희망퇴직 거부에 “재취업 교육 받아라” 20대도 예외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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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두산인프라코어에 입사한 김모(27) 대리는 지난 9월 인사 담당자의 호출을 받았다. “지금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으면 더 큰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김 대리는 “부당하다”며 반발했다. 그러자 회사로부터 ‘역량 향상 교육’을 받으라는 통보를 받았다. 희망퇴직을 거부한 동료 20여 명과 지정된 장소에서 휴대전화를 반납한 채 ‘이력서 쓰기’ 같은 재취업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지금도 계속된다. 김 대리는 “부모님은 회사를 다니는 걸로 알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20대 신입사원을 포함한 사무직 30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진행한 것을 두고 가혹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박용만(60) 두산그룹 회장은 16일 “신입사원은 희망퇴직 대상에서 제외하겠다”며 한발 물러섰다.

두산인프라코어, 신입도 퇴직 포함
박용만, 논란 커지자 “신입은 제외”
삼성은 전자 포함 5700명 내보내

개인면담 수십 차례 ‘찍퇴’도 많아
3분기 실업급여 신청 2030이 41%
“기업, 사람만 줄여선 도약 어려워”

20대까지 희망퇴직 대상으로 내몰릴 정도로 대기업에 구조조정 ‘한파’가 몰아치고 있다. 구조조정 여파로 수많은 회사원들이 거리로 내몰렸던 1997년 외환위기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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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X조선해양도 20대 사원을 포함한 전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접수 중이다.

 삼성물산 건설부문에서 일하는 이모(31)씨도 최근 사직을 권고받았다. 이씨는 “신규 취업은 어려운 나이고 경력으로 일자리를 구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 퇴사를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처럼 취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회사원까지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서 올 3분기 기준 실업급여 신청자 중 20~30대 비율이 41%에 달했다.

 실적 부진의 늪에 빠진 조선업계도 인력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2012년 창사 이래 첫 희망퇴직을 진행한 현대중공업은 올 초 사무직 1400여 명이 회사를 떠났다. 대우조선해양은 올 8월 이후 임원의 30%를 감축했다. 삼성중공업도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최근 수년 새 ‘칼바람’을 맞은 증권업계에 이어 은행권도 대규모 희망퇴직을 진행 중이다. 한국SC은행과 NH농협은행은 각각 근속 10년 이상, 만 56세 이상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 KB국민은행·신한은행도 조만간 희망퇴직을 실시할 예정이다. 업황이 좋지 않은 건설·철강 분야에서도 희망퇴직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전통적으로 대규모 희망퇴직을 진행한 적이 없었던 삼성마저 희망퇴직에 나섰다. 3분기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삼성전자를 비롯한 13개 주력 계열사에서 전체의 2.5%가 넘는 5700여 명이 삼성을 떠났다. 이 기간 동안 삼성전자 999명, 삼성디스플레이 1339명, 삼성전기 814명, 삼성SDI 687명이 각각 옷을 벗었다.

 실적 부진도 감원의 원인이지만 실적이 좋더라도 사업의 불확실성에 따른 ‘보험’ 측면에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곳이 많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 8월 기업 253곳을 설문한 결과 20%가 인력 구조조정 계획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구조조정 의사를 밝힌 기업의 73%가 올 하반기에, 24%는 내년 상반기에 구조조정을 하겠다고 답했다. 내년부터 시행하는 정년 60세 연장 의무화도 기업 입장에선 부담이다.

 희망퇴직 형식을 빌리지만 실상은 ‘찍퇴’(특정인을 찍어 퇴사를 권고)라는 지적도 나온다. 상담 호출을 한 뒤 “낮은 임금을 감수하기보다 위로금을 받고 회사를 떠나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고 회유하는 게 대표적이다. 수십 차례 이상 개인 면담을 진행하거나 교육 발령을 내고 연고 없는 지방으로 파견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이뤄진다.

 선종문 썬앤파트너스 대표변호사는 “희망퇴직이란 이름을 걸고 사실상 퇴사를 강요한 경우 근로기준법 위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승택 노동연구원 연구관리본부장은 “충분한 자구 노력 없이 손쉬운 ‘수건 짜내기’식 인력 감축에만 매달려선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몰라도 한 단계 도약하긴 어렵다”며 “기업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신성장 동력에 대한 과감한 투자와 사업 재편을 통한 개혁도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기환·채윤경 기자 kh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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