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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등산 봉정사에 가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더라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한국 전통 산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가 2018년을 목표로 추진 중이다. 재조명되는 전통 사찰 중에서도 특히 가을 단풍으로 사랑받아온 경북 천등산() 자락의 봉정사()는 종이 봉황을 날려 앉은 자리에 지었다는 창건 설화만큼이나 독특하고 전통적인 사찰이다. TONG청소년기자단이 정연상 안동대 건축학과 교수와 함께 봉정사 속 한국의 멋을 알아봤다.

사찰의 얼굴,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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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연상 교수가 봉정사 일주문 앞에서 일주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정연상 교수가 봉정사 대문인 ‘일주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봉정사의 영역은 ‘일주문’에서 시작된다. 산속 깊숙히 위치한 사찰을 찾으면 처음 만나게 되는 ‘얼굴’이다. 절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속세에서 벗어나 불국토에 발을 들여놓는다는 의미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경건한 마음가짐을 다잡는 장소다. 일반적인 건물의 문과 달리 양쪽에 기둥 하나씩을 세워 지붕을 얹은 문이라 하여 일주문이라 부른다. 일주문의 현판엔 보통 절 이름이 쓰여있다. 대부분의 사찰들은 일주문을 가지고 있지만, 경북 청도에 자리한 운문사의 경우 일주문이 없다고 한다. 절의 이름에서 알 수 있다시피, 하늘에 있는 구름이 바로 운문사의 일주문이라는 것이다.

자연과 공존하는 건축법, 자연석 기단
산을 깎아 내는 현대의 건축 방식과는 달리, 봉정사는 산 기슭을 흙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고 다지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건축방식이지만 건물 내에서 보이는 전경과 일조권을 침해하지 않아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다. 봉정사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건축이 아닌 사찰의 주인인 ‘부처’를 위한 공간인 것이다.

인사를 잊을까 낮게 만든 누하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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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의 출입구 만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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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하진입 형식인 만세루를 지나면 대웅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하면 마중은 필수. 사찰을 찾아 먼 길을 걸어온 방문자들을 위해 봉정사의 출입구 역할을 하는 ‘만세루’가 손님을 반긴다. 만세루는 2층 누각 형태로 누하진입() 방식으로 지어졌다. 문루 아래의 낮은 문으로 출입하는 방식인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내부로 들어오면 봉정사 중심에 자리잡은 대웅전의 실체가 서서히 드러난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웅전의 모습에 신경을 빼앗기지 말고, 사찰의 주인인 부처의 마음으로 절 안에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대웅전 앞에 병풍처럼 펼쳐진 천등산의 모습을 바라보면 정말 부처가 되어 극락세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고려와 조선의 콜라보레이션. 대웅전과 극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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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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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정사 극락전
봉정사 극락전의 처마를 받치고 있는 주심포
정교하고 화려한 무늬를 띤 봉정사 극락전의 단청

만세루 아래를 통과해 바로 보이는 큰 건물이 바로 석가모니불을 모신 법당, 대웅전이다. 대웅전은 조선 초기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대는 미상이다. 기록에 따르면 1435년부터 1999년까지 몇 십번의 보수 공사를 거치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웅전과 함께 봉정사의 대표 건물인 극락전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로 유명하다. 1972년 수리를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상량문에는 1363년에 수리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이 기록을 바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대략 고려 초중기에 지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자세히 살피면 통일신라의 건축 방식도 보인다.

조금만 관찰하면 대웅전과 극락전의 모습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날개를 편 듯한 팔작지붕의 대웅전과 달리 극락전은 평범해 보이는 맞배 지붕이다. 또한 내부구조 역시 천장을 우물정 모양으로 만들어 단순하게 만든 대웅전(조선의 우물천장)에 비해 극락전은 지붕을 열어 두어 정교한 무늬의 천장사이로 건물의 구조가 전부 보인다(고려의 연등천장). 이는 대웅전이 조선시대에 보수되면서 조선의 건축 양식을 많이 따랐기 때문이다.

숭유억불의 조선, 사찰을 보수했다고?

여기서 잠깐. 역사시간에 배우기를 조선시대 때는 불교를 억압했다고 하는데, 사찰 보수작업은 어떻게 했을까? 이는 정치적 배경과 연관이 있다.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정치에 적극 활용한 고려시대와 달리, 조선은 유교를 국가의 기본 체제로 삼고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고려시대에도 유교사상이 있었던 것처럼, 불교 역시 조선시대의 생활의 일부분이었다. 불교가 정치적으로 사용되지 않은 것일 뿐,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깊이 녹아있었다는 말이다.

세계 속의 한국 전통 건축, 그 속의 봉정사

봉정사에서 영산암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봉정사에서 영산암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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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곳곳에 마루가 트여있어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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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암 내 정원

하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봉정사의 독서실이라고 할 수 있는 영산암()이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 이곳은 스님들의 개인 공부 공간이라고 한다. 교수님과 마루에 나란히 앉아 영산암의 정원을 구경했다. 쭉 뻗은 서양의 정원과 아기자기한 미니어처 형태의 일본식 정원과는 달리 나무가 있는 그대로, 바위가 튀어나온 그대로 놔둔 정원은 한국 건축 특유의 융통성과 자연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때 눈에 띈 작은 건물 하나. 바로 산신을 모시는 당우, 삼성각(閣)이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삼신할매와 같은 토속신앙이 불교 문화와 융합하여 발현된 모습이라고 한다. 인도에서 건너온 불교를 우리나라의 정서와 특성에 맞추어 우리의 것으로 만든 조화의 상징이다.

한국 전통 사찰의 가치가 높아지는 지금, 정신없는 속세를 떠나 한국의 정원을 거닐어 보는 것은 어떨까?

글=이은호·최혜진(분당고 2) TONG청소년기자, 청소년사회문제연구소 서현지부

사진=장진영 기자 artjang@joongang.co.kr

자문=정연상 안동대 건축학과 교수

지도와 함께 보는 봉정사 제작=노경서·김슬기(중산고 1)·최미애·최지혜(충주여고 1) TONG청소년기자, 청소년사회문제연구소 교현지부

‘TONG 우리 역사 바로 알기 캠페인’ 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과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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