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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약하라 … 드넓은 자유를 상상하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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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5호 27면

오스트리아의 피아니스트·작곡가 프리드리히 굴다(1930~2000). 재즈 피아니스트로도 유명하다.

현재가 만족스럽지 않은 사람들은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끌어와 한 시절을 버틴다. 천국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유토피아일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이 결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세나 초월 같은 것은 현실의 모순을 외면하게 만든다. 거기에 원대한 비전을 현실화하는 과정은 종종 전체주의적 디스토피아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꿈꾸기를 멈출 리는 없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해 희망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카를 만하임은 인간이 유토피아를 포기한다는 것은 역사를 형성하려는 의지와 역사를 이해하려는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유토피아라는 말은 종종 이상주의와 동의어로 공격받는다. 허무맹랑한 백일몽이라거나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면박 받는다. 만하임은 후자를 상대적 유토피아라고 말한다. 돌이켜 보면 인류의 역사는 단 한 번도 불임(不姙)의 공간인 적이 없었다. 늘 개인과 공동체의 보이지 않는 다양한 꿈과 소망들이 역사의 시공간에 씨를 뿌렸던 것이다. 역사는 사람들이 비웃었던 유토피아를 또 다른 사람들이 꿈꾸고, 낳고, 키워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음악계에도 혁명적인 상상과 도약이 있다.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기술이 변화를 이끈다. 18세기 등장한 피아노는 음악계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다. 작곡가들은 해머로 현을 두드리는 방식이 넓혀 놓은 표현력에 빠져들었으며 귀족들은 풍부한 음색과 아름다운 디자인에 악기상을 찾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불세출의 스타가 한 명 나타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다. 그는 피아노의 가능성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챈 선구자요 혁명가다. 그가 만든 27개의 피아노 협주곡들은 피아노의 위상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 중 협주곡 23번 K488의 2악장 아다지오는 백미다. 이 곡은 초기 피아노 소나타 2번 K280의 2악장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 아다지오 악장의 선율적인 특징은 가히 아름다운 비상(飛上)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카루스의 도약’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진다.


먼저 애상적인 피아노의 제1주제가 시작된다. 일명 ‘시실리아 테마’라고도 한다.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서는 이 주제가 영화 내내 흘러나온다. 악명 높은 군대 교관은 강한 군대에 이런 귀족들의 노래는 필요 없다고 윽박지른다. 교관은 훈령병에게 예수를 외면한 베드로처럼 모차르트를 부정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훈련병은 신념을 지키며 불이익을 감당한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바닷가에서 훈련병이 연주하는 모차르트의 선율에 잠을 깬 교관은 한참 말없이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본다. 결국 그 역시 “모차르트는 위대하다”고 선언한다.


피아노가 건넨 서늘한 1주제가 끝나면 클라리넷이 눈 덮인 산의 정상을 살짝 보여주듯 응답한다. 미래의 시간, 소망의 공간이 그 너머에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이어서 오선지를 사이에 두고 천상과 지상, 이상과 현실이 독주 피아노와 목관악기, 현악기 사이를 오고 간다. 서로 두 손을 맞잡기도 하고 서로의 등을 토닥이기도 한다. 그로 인해 위로받은 피아노 선율에는 물기가 그득하다.


이제 피아노는 슬픔과 기쁨 그리고 소망의 염원을 담아 한 번의 거대한 도약을 준비한다. 한 번 맛보는 소망의 시간, 자유의 시간이 영원한 추락과 그리움을 남기게 될지라도 밀랍을 단 이카루스는 날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모든 유토피아의 꿈은 그것이 현실이 되는 순간 다시 멀어지기 때문이다. 피아노는 먼저 낮은 목소리를 타전(打電)한다. 더 높이 날기 위해 움츠린 셈이다. 그리고 이내 단 한 순간의 도약, 한 번의 비상이 이루어진다. 저 높은 곳의 유토피아와 조우한다. 무려 3옥타브 가량을 날아 오른 것이다. 모차르트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들어보지 못했을 혁신이다.

굴다와 아르농쿠르의 협연 음반.

피아노 협주곡 23번은 알만한 피아니스트들은 한 번쯤은 음반으로 남겼다. 하지만 가장 모차르트다운 느낌을 주는 연주를 꼽으라면 빈 출신의 프리드리히 굴다의 것을 택하고 싶다. 그는 공식적으로 이 곡에 대해 4종의 음반을 남겼다. 니콜라스 아르농쿠르와의 협연에서는 굴다 특유의 약간의 즉흥성도 발휘된다. 굴다의 연주는 어린 짐승들이 재잘 거리며 밟고 지나간 눈밭을 연상시킨다. 가볍게 눌린 발자국 사이로 웃음과 호기심 그리고 어린 것들의 여린 두려움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어느덧 달력도 한 장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 초 누구나 모차르트의 아름다운 도약처럼 자신의 삶이 훌쩍 커져 있기를 바랬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조금은 더 성숙해져 있기를 염원했을 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쓸쓸하게 남은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다. 최근에 작고한 정치학자 셀던 월린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아직 ‘백 개의 비전(vision)과 백 개의 시정(revision)’을 꿈꿀 시간이 아직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를 꿈꾼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미래지향적이고 현실적인 것이다. 또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참여시키겠다는 휴머니즘의 발현이다. 모차르트가 만들어낸 짧은 이상향으로의 도약을 반복해서 들으며 드넓은 자유를 상상한다. 현실은 언제나 우리를 무겁게 만들지만 우리가 아름다운 비상의 소망마저 빼앗긴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엄상준 KNN방송 PD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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