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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54] 군자금 지키려다 일본군에 총살당한 양광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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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으로 이주한 옌유윈(가운데)은 유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46년 가을 뉴욕. [사진 김명호]

중일전쟁 발발 초기인 1937년 11월, 양광성(楊光?·양광생)은 필리핀에 부임했다. 직급은 공사였지만 공식 직함은 마닐라 총영사였다. 당시 필리핀은 미국이 관할권을 쥐고 있었다. 대사관 설치가 불가능했다.

필리핀 부임 이후 600만 달러 모금
마닐라 점령 일본군이 뺏으려 꼼수
“화교 몰살” 협박했지만 끝까지 거부
영사관 직원 7명과 함께 희생당해

프랑스에 머물던 옌유윈(嚴幼韻·엄유운)도 파리를 떠났다. 중도에 홍콩에서 장스윈(蔣士運·장사운)을 만났다. 연금중인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생각하며 대성통곡했다. 옌유윈이 마닐라에 도착하기 전부터 중국 총영사의 부인이 부잣집 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일류 도둑들은 옌유윈이 오기만 기다렸다.

70여년 후 옌유윈은 재미있는 구술을 남겼다. “도착 며칠 후 남편과 함께 맥아더가 주최하는 만찬에 참석했다. 닭 우는 소리를 들으며 돌아왔다. 집안에는 금고가 없었다. 착용했던 패물들을 옷장에 넣고 잠들었다. 깨어보니 흔적도 없었다. 경찰에 신고했다.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답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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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유윈(왼쪽)이 장쉐량과 장제스의 고문이었던 도널드와 이야기하고 있다. 1945년 3월 마닐라.

미국인 사회에 떠돌던 얘기도 곁들였다. “경찰국장이 내 패물들을 대통령 부인에게 선물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국장은 도둑질에 동원한 부하들을 해외로 내보냈다. 보석들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명품들이었다. 내가 파리와 몬테카를로·이탈리아 등에서 구입한, 다이아몬드가 박힌 목걸이와 반지는 당대 최고 디자이너들의 작품이었다. 나는 재물은 잃었지만, 가장 소중한 생명과 건강, 가정은 잃지 않았다며 자신을 달랬다. 평정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리핀에는 10만여명의 화교가 있었다. 화교들은 자기들끼리만 어울렸다. 양광성은 우수한 화교들을 미국인 사회에 끌어들였다. 필리핀 고관들과도 연결시켰다. 필리핀 사람들은 화교들을 싫어했다. 혐오하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툭하면 화교가 운영하는 식료품 가게들을 습격했다.

양광성은 화교 상인들에게 3일간 파업을 종용했다. 식자재 구입에 불편을 느낀 필리핀 사람들이 화교의 중요성을 깨닫자 성장과 시장들을 관저로 초청했다. “중국은 예전부터 지방 수뇌들을 부모관(父母官)이라고 불렀다. 필리핀에는 중국인이 없는 곳이 없다. 이들의 근면과 노동력은 필리핀 사람들의 생활 개선에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한다. 부디 자식처럼 대해주기 바란다.”

양광성이 필리핀에 온 주요 목적은 전쟁자금 모금이었다. 산재해 있는 도서(島嶼)와 도시에 발자취를 남겼다. 필리핀 사람 중 40%가 중국 혈통이었다. 4년간 미화 600만 달러를 모금했다.

쑹메이링(宋美齡·송미령)은 옌유윈을 중국부녀위문단 필리핀지부 명예주석에 위촉했다. 옌유윈은 돈 많은 화교 70여 명에게 편지를 보냈다. “부활절 예배를 마친 후 부인들과 조촐한 다과회를 갖고 싶다. 참석을 권유하기 바란다.” 부호 부인 600여명이 모인 자리에서 갖고 있던 황금을 쾌척하자 다들 얼떨결에 따라 했다. 이날 모금한 금품으로 의료품 100만 상자를 중국전선에 보냈다.

41년 12월 8일,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했다. 태평양 전쟁의 막이 올랐다. 일본은 미군 관할지역인 필리핀도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튿날 마닐라의 상업지역이 불구덩이로 변했다. 양광성은 전쟁 의연금을 낸 화교 명단을 소각했다.

미군은 마닐라가 파괴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일본군에게 저항할 뜻이 없다며 개방도시를 선포했다. 그래도 일본군은 포격을 멈추지 않았다. 총독이나 다름없던 맥아더는 마닐라 철수를 결정했다. 양광성에게 가족과 함께 떠나자고 재촉했다. 양광성은 맥아더의 청을 거절했다. “이곳에 남겠다. 화교들을 보호하는 것이 내 책임이다.”

42년 1월 2일, 일본군이 마닐라에 진입했다. 미군은 유류창고를 폭파하고 철수했다. 도시 전체가 시꺼먼 연기로 뒤덮였다.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튿날, 대통령궁과 미군 사령부에 일장기가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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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의 앵글에 잡힌 필리핀의 일본군 사병들. [사진 김명호]

마닐라를 점령한 일본군은 영국인과 미국인 체포에 나섰다. 양광성도 무사하지 못했다. 영사관 직원 7명과 함께 일본군들에게 끌려갔다. 지켜본 큰 딸이 구술을 남겼다. “우리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앳된 일본군이 아버지를 체포하러 왔다. 사병들은 예의 바르고 신속했다. 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옷 보따리를 들고 따라갔다. 엄마 따라 몇 차례 면회도 갔다. 한번은 아버지가 ‘빨리 자라서 내 대신 엄마를 잘 돌보라’고 당부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다. 아버지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화교 10만여명을 구금할 계획이었지만, 경비가 문제였다. 대신 양광성과 화교 영수들을 회유했다. “모금한 돈을 내놔라. 일본군 2000명이 기관총을 뿜어대면, 1분 내에 화교 10만을 몰살시킬 수 있다.”

양광성은 거절했다. 4월 17일, 일본군은 비밀리에 양광성과 영사관원 7명을 총살했다. 남편이 죽은 줄 모르던 옌유윈은 영사관 직원 가족들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돌봤다.

45년 2월 3일,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군이 마닐라에 돌아왔다. 함께 온 윌리엄 도널드가 맥아더의 부인과 함께 옌유윈을 찾았다. “양광성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중국은 내전이 멀지 않았다. 애들 데리고 미국으로 가라.”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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