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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의 생각지도

그 시절로 돌아가기 싫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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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훈범
이훈범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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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
논설위원

밀란 쿤데라는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우연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썼다. “집시들이 커피잔 바닥에서 커피가루 형상을 통해 의미를 읽듯 우리는 우연의 의미를 해독하려 애쓴다.”

 그런 주술적 힘을 가진 우연이 얼마 전 일어났다. 130명의 목숨을 앗아간 파리 테러와 광화문 폭력시위가 신문의 같은 면에 실렸다. 아무 관련이 없는 두 사건이 이후 커피가루처럼 섞였다. 그 의미를 해독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우리 대통령도 그랬다. 복면을 쓴 과격시위자들을 테러집단에 견줬다. 복면시위를 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감기몸살을 무릅쓰고 예정에 없던 국무회의까지 소집한 대통령의 말이었다. 법무부 장관이 거들고 여당 의원들이 총대를 멨다. 복면시위를 금하는 집시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2004년 이후 8번째다. 거의 매년 제출됐다는 건데 그때마다 반대여론에 밀려 폐기됐다. 우리 헌법재판소의 의견도 부정적이다. 그런데 이번엔 목소리가 제법 크다. 충격적인 테러와 오버랩된 우연의 주술 탓이다.

 복면의 익명성이 사람을 공격적으로 만드는 건 분명하다. 테러집단뿐 아니라 테러진압부대 요원들이 복면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인디언처럼 얼굴에 칠을 하는 것, 때로는 같은 제복을 입는 것만으로도 비슷한 효과를 얻는다. 복면시위가 폭력화될 확률이 높은 게 그래서 더 사실이다. 폭력을 위해 복면을 준비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폭력시위는 용납될 수 없다는 건 말이 필요 없다. 복면을 쓰고 행한 폭력은 더욱 엄중히 처벌돼 마땅하다. 그렇다고 얼굴을 가리는 것까지 금지하는 건 찬성하기 어렵다. ‘복장의 자유’ 운운하는 건 식상하다. 열 명의 폭력시위꾼을 막는 것보다 자신의 신분 아닌 의사(意思)를 알리고픈 한 명의 합법시위자를 보호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보다는 실효성이 의심되는 게 반대의 이유다. 복면금지가 아니더라도 폭력시위는 명백한 불법이다. 불법은 현장에서 강력 진압해야 한다. 그걸 막지도 못하면서 채증으로 범법자를 추후 색출하는 데만 기대는 건 공권력의 직무유기다. 불법시위를 사실상 방조하는 것이란 말이다. 방조된 불법이 과열로 이어질 건 뻔한 일이다.

 더 큰 이유가 따로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게 두려운 까닭이다. 복면이 폭력을 증폭한다고 모든 복면을 폭력으로 규정해 금지하는 건 권위주의 시대의 발상이다. 유신시대의 긴급조치도 그런 사고에서 출발했다. 국가 목표에 방해가 된다면 국민의 자유와 권리도 얼마든지 유보할 수 있었던 국가 폭력이란 얘기다. 영면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우리가 가장 고마워하는 게 뭔가. 그 암울한 시대의 무게를 어깨에서 내려준 것 아니었던가.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가긴 싫다. 한줌밖에 안 되는 폭력시위꾼들 없애겠다고 훨씬 거대한 국가 폭력의 품 안으로 들어가긴 싫단 말이다.

 폭력시위꾼들이 복면을 따라 없어진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란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 있다. 미국과 프랑스·독일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복면시위를 금지한다고. 하지만 그들의 입법 배경은 원죄에 가깝다. 독일은 나치 따위의 전체주의 세력, 미국은 KKK단 같은 인종차별주의자들의 준동과 발호를 막으려는 고육책이다. 프랑스는 히잡·부르카 같은 종교 색을 공공장소에서 드러내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여전히 논란이 많다. 따라 배울 게 아닌 것이다.

 그보다는 폭력시위꾼들과 같은 시위현장에 있었던 시민들에게 배워야 한다. 수만 명의 시민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 알아야 한다. 교과서가 문제 있다고 국정으로 바꿔버리는 권위주의 사고를 거부하는 거다. 그것을 복면금지 같은 또 다른 권위주의로 막겠다는 건 해결책이 아니다. 국가의 폭력은 복면 없이도 쇠파이프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