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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패스트볼에 당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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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 패스트볼(high fastball).

스트라이크존 위의 공을 뜻하는 말로 메이저리그에서는 하이 피치(high pitch)로도 부른다. 타자 눈에 잘 보여 홈런을 얻어맞기 좋은 공이다. 그러나 한국 야구대표팀은 일본 투수들이 던지는 하이 패스트볼에 완벽하게 당했다.

한국은 8일 일본 삿포로돔에서 열린 ‘프리미어12’ 개막전에서 ‘괴물 투수’ 오타니 쇼헤이(21·니혼햄)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6이닝 동안 안타 2개에 삼진 10개를 당하며 1점도 뽑지 못했다. 이어 노리모토 다카히로(25·라쿠텐), 마쓰이 유키(20·라쿠텐)에게도 막혀 0-5로 완패했다. 오타니(최고 시속 161㎞)와 노리모토(최고 157㎞)의 직구와 포크볼 조합이 인상적이었다.

일본 투수들이 포크볼을 잘 던지는 건 새롭지 않다. 한국 타자들의 의표를 찌른 건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오타니가 3회와 5회 강민호를 연속 삼진으로 돌려세운 결정구, 5회 번트를 시도하는 허경민의 몸쪽을 위협한 공이 하이 패스트볼이었다. 노리모토가 7회 박병호, 8회 김현수를 삼진으로 잡아낸 공도 마찬가지였다.

선수 시절 일본 요미우리에서 뛰었던 정민철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초반엔 오타니가 한국 타자들을 탐색하는 느낌이었다. 한국 타자들이 높은 공에 대응하지 못하자 중·후반에는 하이 패스트볼 비중을 높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 위원은 “오타니와 노리모토의 공이 빠른 데다 회전력도 워낙 좋았다. 그런 공이 눈 높이로 들어오니 방망이가 나갈 수밖에 없었다. 한국 타자들에겐 낯선 공배합”이라고 덧붙였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높은 직구는 타자의 핫존(hot zone)이다. 이효봉 스카이스포츠 해설위원은 “한국 투수들은 하이 패스트볼을 많이 던지지 않는다. 타자가 치지 않을 것 같은 볼카운트에서 셋업피치(결정구를 던지기 전의 유인구)로 가끔 쓰는 정도”라며 “반대로 일본 투수들은 타자에게 불리한 카운트 때, 그러니까 꼭 쳐야 할 타이밍에 하이 패스트볼로 헛스윙을 유도한다. 시속 150㎞의 빠른 공이 눈엔 보여도 치긴 어렵다”고 분석했다.

이날 맞대결을 통해 일본 투수들의 강점이 명확히 드러났다. 그들은 한국 투수들에겐 영감을, 한국 타자들에겐 숙제를 줬다. 정민철 위원은 “이건 우열의 문제라기보다 스타일의 차이다. 메이저리그 투수들이 살짝 떨어지는 싱킹 패스트볼을 선호하고, 일본 투수들은 공의 회전력을 이용해 하이 패스트볼을 던진다. 반면 한국 투수들은 어려서부터 좌우 스트라이크존 공략이 가장 중요하다고 배운다”고 말했다.

게다가 한국에선 수년간 타고투저(打高投低)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높은 공을 던지면 장타 허용률이 높기 때문에 투수들은 점점 더 낮게만 던지려 한다. 또한 한국에만 있는 헤드샷 퇴장 규정(빠른 공으로 타자 헬멧이나 안면을 맞히면 곧바로 투수 교체)도 하이 패스트볼 구사를 더 어렵게 한다.

한국 투수, 또는 한국에서 뛰고 있는 외국인 투수 중 시속 150㎞ 안팎의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는 여럿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스트라이크존 상단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투수는 드물다. 올해 포스트시즌의 영웅 더스틴 니퍼트(34·두산)와 정규시즌 다승왕(19승) 에릭 해커(32·NC) 정도가 하이 패스트볼을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하이 패스트볼 구사율을 높여 단기간에 기록이 상승한 투수도 있다. 이번 대표팀에 선발된 좌투수 차우찬(28·삼성)은 올 시즌 스트라이크존 위를 ‘블루 오션’ 삼아 공략한 끝에 개인 최다승(13승)을 거뒀고, 탈삼진왕(194개)까지 차지했다. 통계사이트 스탯티즈에 따르면 올 시즌 차우찬이 던진 직구의 21.3%가 하이 패스트볼(리그 평균 13.7%)이었다. 피안타율은 0.074(54타수 4피안타)에 그쳤다. 하이 패스트볼을 좌타자 바깥쪽으로 던진 경우 피안타율이 0.000(7타수 무안타), 우타자의 바깥쪽으로 던졌을 때 피안타율이 0.125(16타수 2안타)에 불과했다.

차우찬의 공 스피드는 오타니보다 시속 10㎞ 정도 느리지만 그의 하이 패스트볼은 충분히 통했다. 한국 투수들이 보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개발하고, 타자들도 이에 대응한다면 한국 야구의 국제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 일본전에선 완패했지만 배울 점도 많았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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