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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경민의 시시각각

삼성 스마트폰 5년 후에도 나올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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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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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경제부장

하루가 멀다 하고 새 위기가 등장한다. 온통 사면초가(四面楚歌)다. 그러나 위기는 기회의 다른 얼굴이기도 했다. 팔아먹을 게 없어 아낙네 머리카락과 오줌까지 수출했던 나라. 지지리도 가난했던 한국이 중화학공업국으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 건 두 차례 오일쇼크가 덮친 1970년대였다. 72년 울산석유화학단지, 73년 포항제철, 74년 당시로선 세계 최대였던 현대조선소(현대중공업)가 문을 열었다. 현대자동차가 포니를 양산하기 시작한 건 76년이다. 이건희 동양방송(TBC) 이사는 74년 사재를 털어 부도 직전이었던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50~60년대 폭풍 질주했던 독일과 일본이 오일쇼크에 놀라 움츠린 바람에 한국에 솟아날 구멍이 생겼다.

 80년대 한국은 위기를 맞았다. 중화학공업 과잉 투자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본 엔화값을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85년 ‘플라자합의’가 살려줬다. 무역·재정 쌍둥이 적자로 궁지에 몰린 미국이 무역흑자국 일본·독일의 팔을 비틀었다. 일본·독일 수출품 가격이 치솟은 덕에 한국이 어부지리(漁夫之利)했다. 유가와 금리까지 바닥을 긴 건 천우신조(天佑神助)였다. 운도 좋았지만 70년대 과감한 중화학공업 투자와 80년대 선제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3저(저유가·저금리·저달러) 호황’은 그림의 떡이 됐을지 모른다.

 90년대 후반 한국은 다시 한번 벼랑 끝에 섰다. 그러나 이념을 초월한 김대중 정부의 신속·과감한 구조 개혁으로 국제통화기금(IMF)의 빚을 2년 만에 갚았다. 99년 칠레를 시작으로 세계 49개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을 수 있었던 것도 일찍 군살을 뺀 덕이었다. 그러자 기회가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경제 굴기에 나선 중국이 재주를 부리는 사이 뒤에서 엽전을 챙긴 건 중간재를 대준 한국 제조업이었다. 한발 앞선 FTA를 발판으로 무역 장벽을 뛰어넘은 덕에 세계 교역량이 쪼그라드는 악천후에도 한국 수출은 순항했다.

 한데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취해 잠깐 졸았던 게 화근이 됐다. 한국 제조업이 이른바 ‘혁신가의 딜레마(The Innovators Dilemma)’에 빠진 사이 중국이 턱밑까지 추격해 왔다. 갑자기 1등이 된 삼성전자가 혁신 아이디어 빈곤에 허덕이는 동안 저가를 앞세운 샤오미가 바짝 따라붙었다. 오일쇼크 때 우물쭈물하다 한국에 덜미 잡힌 일본의 데자뷔다. 심지어 미국 시장조사 회사는 삼성전자가 5년 안에 스마트폰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을 거란 보고서까지 내놨다. 게다가 성장 속도 조절을 위해 수출 대신 내수를 키운다는 중국의 ‘신창타이(新常態)’ 정책은 한국 제조업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중국에 중간재를 팔아 엽전을 챙겨 온 체질을 빨리 바꾸지 않으면 제2, 제3의 대우조선해양이 속출할지 모른다.

 혈맹이라던 미국의 태도도 싸늘해졌다. 80년대 미국의 쌍둥이 적자는 일본과 독일의 희생으로 메웠다. 2008년 금융위기를 겪은 미국엔 새 희생양이 필요하다. 미국이 겨눈 화살 끝엔 중국이 있다. 미국·일본 등 12개국이 맺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엔 그런 미국의 속내가 노골적으로 묻어난다. 공기업에 대한 정부 지원을 금지한 규정이 대표적이다. 중국의 수출을 이끈 건 국영기업이다. 정부더러 공기업 지원을 끊으라는 건 수출을 접으라는 얘기다. 중국을 향한 화살인데 어쩐지 한국이 뜨끔하다. “TPP 12개국이 환율 조작 금지에 합의했다”는 제이컵 루 미 재무장관의 6일 성명도 허투루 들리지 않는다.

 중국의 추격과 미국·일본의 견제 사이에 낀 한국으로선 진퇴양난(進退兩難)의 형국이다. 제조업에만 기댄 성장전략부터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렵게 됐다. 수십 년 묵은 일상의 관성을 훌쩍 뛰어넘을 체질 개선이 시급한 까닭이다.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삼성 스마트폰은 물론 한국 제조업의 5년 후도 장담할 수 없다. 체질은 ‘좀비기업’ 몇 개 솎아낸다고 바뀌는 게 아니다. 대학 난립을 낳은 교육제도, 고용 절벽을 자초한 경직된 임금체계, 혁신을 옭아매고 있는 규제와 관료주의를 통째로 뜯어고쳐도 될까 말까다.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