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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틴틴 경제] 정부가 왜 추곡수매를 하나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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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해마다 가을이면 정부가 그 해 추수하는 벼의 일정 물량을 사곤 합니다. 올해엔 정부가 벼를 사주는 값을 지난해와 같게 하도록 지난 19일 국회가 결정했습니다. 왜 정부가 농민들에게서 벼를 살까요.

또 벼를 사는 값을 둘러싸고 왜 농민단체와 정부, 국회가 승강이를 벌이는 것일까요.

우선 농민들이 농사를 지어 거둔 벼가 어떻게 해서 우리 밥상까지 오게 되는지 알아볼까요. 농민들이 생산한 벼의 대부분은 도정업체들이 삽니다. 도정은 벼를 찧어서 껍질을 벗겨 쌀로 가공하는 것을 말합니다. 도정 업체들은 쌀을 포장해서 할인점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팝니다.

그런데 농민들이 생산한 벼의 10% 가량은 정부에서 삽니다. 많을 때는 30%까지 정부에서 구입했습니다. 정부가 벼를 사는 이유는 쌀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주식이기 때문입니다. 쌀이 부족하면 굶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또 쌀값이 오르더라도 끼니를 거를 수는 없으니 비싸게라도 사지 않을 수 없겠죠. 따라서 쌀값이 많이 오르면 다른 곳에 쓸 돈이 줄어들어 살림살이가 힘들어질 것입니다.

그만큼 쌀이 중요하니까 정부가 쌀 생산량을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하고, 값이 너무 오르지 않도록 조절할 필요가 있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정부가 벼를 사주는 '추곡 수매제도'입니다.

정부가 수매 제도를 통해 어떻게 쌀 가격과 수급을 조절해 왔는지를 알아봅시다. 풍년이 들어 벼가 많이 생산되면 당연히 가격이 떨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생산비보다 가격이 떨어지면 농민들이 다음해엔 벼 농사를 안 지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기상 조건이 나빠지기라도 하면 식량난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벼 생산량에 관계없이 농민들이 적정한 이윤을 낼 수 있도록 비싼 값에 벼를 삽니다. 이렇게 정부가 벼를 사들이는 가격을 '수매가'라고 합니다.

쌀이 많이 나오는 가을엔 쌀값이 내리다가도 시간이 흘러 쌀이 부족해지는 봄.여름에는 쌀값이 오르곤 합니다. 정부는 이렇게 쌀값이 오를 때 사놓았던 쌀을 싼 값에 내놓아 쌀값을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부가 벼를 도정업체에 팔고 도정업체가 쌀로 만들어 시장에 내놓지만, 1992년까지는 정부가 직접 도정을 해서 팔았습니다. 이렇게 판매되는 쌀을 '정부미'라고 불렀습니다.

정부가 이처럼 벼를 비싸게 사서 싸게 파는 것을 두고 '이중 곡가제'라고 합니다. 6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밑지는 장사지만 쌀값 안정과 공급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그런데 한두 번은 몰라도 수십년간 이 제도를 시행하다 보니 정부는 많은 빚을 지게 됐습니다. 92년엔 빚이 6조원까지 늘어났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93년부터 수매량을 확 줄였습니다. 빚을 내지 않고 정부가 가진 돈(재정)으로만 벼를 사기로 한 것이죠.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1천만섬 이상 벼를 수매했지만 지금은 절반 수준으로 줄었습니다.

사실 외국 쌀이 국산 쌀보다 훨씬 쌉니다. 우리 쌀 값이 미국이나 중국 쌀보다 4~5배 비싼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값싼 외국 쌀을 무작정 사다 먹을 수는 없는 형편입니다. 외국 쌀 수입에 의존했다가 외국 쌀 유통업자의 농간에 놀아날 위험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빚이 너무 늘어난 데다 우루과이 라운드(UR) 협정으로 인해 더 이상 이중 곡가제를 계속 유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서 추곡 수매 규모를 줄였습니다.

당초 UR 협상이 이뤄지던 과정에서 미국 등은 쌀 수입을 전면 허용하도록 요구했지만, 우리나라와 일본 등은 쌀이 주식인데 값싼 외국쌀이 대량 수입되면 농민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된다고 주장해 쌀 시장 개방은 10년 후에 다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대신 의무적으로 아주 낮은 관세(수입품에 물리는 세금)로 일정한 양의 외국 쌀을 수입하고, 정부가 인위적으로 가격을 조정하는 수매제도는 점점 축소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95년부터 매년 수매에 필요한 예산(수매 보조금)을 7백50억원씩 줄여가고 있고, 지난해엔 1백25만섬의 외국쌀을 수입했습니다.

내년이 바로 쌀 협상을 다시 하기로 한 해입니다. 시장 완전개방 여부와 관계없이 외국쌀 수입은 늘게 돼 있습니다. 완전개방을 하지 않으면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외국쌀의 양을 대폭 늘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수입량이 늘면서 생기는 갑작스런 충격을 줄이기 위해 쌀값을 조금씩 낮춰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쌀 소비가 줄면서 1천만섬이 넘는 쌀이 남아 돌고 있는 것도 부담입니다.

이런 점을 고려해 정부는 올해 수매가를 2%낮추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은 수매가를 낮추면 농가소득이 크게 준다며 반대했고, 국회는 지난해와 똑같은 수준에서 수매가를 정한 것입니다.

김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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