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이봐 해봤어?” 한국 경제를 만든 기업가 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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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1983년 충남 서산간척지를 만들 때 현대건설은 초속 8.2m의 거센 천수만 물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스웨덴에서 사온 고철선 워터베이호로 물살을 막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담당자가 망설이자 정 명예회장은 “이봐 해봤어?”라며 호통을 쳤다. 결과는 대성공. 공사 기간을 3년 단축했을 뿐 아니라 뉴욕타임스에 ‘정주영 공법’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여의도의 33배에 달하는 땅이 이렇게 생겨났다. “이봐 해봤어?”는 이후 한국의 기업가 정신을 대표하는 말이 됐다.

 얼마 전 전·현직 홍보인들의 모임인 한국CCO클럽이 광복 70년을 맞아 설문조사를 했다고 한다. 정 명예회장의 이 말이 기업가 정신을 잘 표현한 말 1위에 올랐다고 한다. 2위는 “마누라,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말이었다.

 기업인의 말에는 그의 인생관이 녹아 있다. 기업인의 인생관이 적극적·긍정적으로 발현되면 기업가 정신이 된다. 기업가 정신 없이는 기업의 성장도 없다. 직원들을 실패의 두려움에서 지켜내고 상상력과 용기를 불어넣는 것도 기업가 정신이다. 우리 경제가 맨손으로 반도체부터 철강·조선·석유화학·섬유·전자·건설·생활용품·의약·운송, 첨단 정보통신기술(ICT)까지 거의 모든 산업군에서 세계 초일류 기업을 일군 비결도 이런 기업가 정신 덕분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한국 경제는 지금 전례 없는 시련과 도전에 직면해 있다. 정 명예회장의 조선 신화는 멸종 위기다. ‘조선 빅3’는 올해 7조원 넘는 적자를 내며 빈사 상태다. 철강·건설·석유화학 역시 한계 상황이다. 반도체·전자·자동차·ICT는 중국의 거센 추격에 위협받고 있다. 과거 성공 방정식은 한계에 왔는데 새 돌파구는 아직 잘 보이지 않는다. 수출이 성장에 기여하기는커녕 되레 발목을 잡는 지경에 이르렀다. 대대적인 추가경정예산을 쏟아붓고 고강도 소비진작책을 펼쳤지만 3분기 1.2% 반짝 성장에 그쳤다.

 올해도 그렇지만 진짜 문제는 내년 이후다. 2%대 저성장이 고착화할 가능성이 크다. ‘컨센서스 이코노미’는 한국의 내년 성장률을 2.9%로 예상했다. 밖으로는 중국의 성장이 둔화하고 미국이 금리 인상을 머뭇거리는 불확실·불안이 이어지고 있다. 안으로는 저출산·고령화의 충격이 가시화하고 가계부채와 청년실업은 임계점에 달했다. 청년들은 삼포·오포를 넘어 칠포세대라며 자조하고 있다. 이대로는 대한민국에 미래가 없다.

 이런 때일수록 더 필요한 게 기업가 정신이다. “나라가 없으면 삼성은 없어도 좋다” “원유는 수입해도 석유는 수출한다”는 등 역대 기업인들의 어록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한국 경제의 짙은 먹구름을 걷어낼 묘방도 이 말들에 담겼을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경제학자 케인스가 언급했던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s)이 발휘돼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