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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그 경제’와 청년 일자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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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
김광기 기자 중앙일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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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기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본부장

요즘 미국에선 경제 신조어 하나가 화두다. 이름하여 ‘기그 경제(Gig Economy)’다. ‘임시직 경제’쯤으로 번역된다. 기그란 1920년대 미국의 재즈 공연장에서 그때그때 주변의 연주자를 구해 단기 공연 계약을 맺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경제학자들은 근래 이 용어를 빌려 산업현장에서 필요한 인력을 잠깐만 쓰는 고용 형태가 확산되는 것을 기그 경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파트타임’ ‘프리랜서’ ‘온디맨드’ ‘우버’ 등도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기그’라는 단어가 폼이 나서인지 대세로 자리 잡았다. 우리말로는 ‘날품팔이’가 가장 가까울 듯도 싶다.

 최근 기그 경제가 사람들의 입에 부쩍 회자된 것은 미국의 고용통계를 둘러싼 논란에서다. 고용은 미국의 금리 인상 시점을 가늠케 하는 핵심 변수다. 미국의 실업률은 현재 5.1%로 완전고용에 가깝다. 이 정도 실업률일 때 미국의 신규 일자리는 월평균 20만 개 이상씩 생겼던 게 과거 추세다. 하지만 최근 통계는 16만 개대에 머물고 있다. 4만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이 의문의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기그 경제다. 일은 하면서도 신규 취업자 통계에 잡히지 않는 독립형 근로자들이 그 공백을 메우고 있다는 해석이다. 이들은 실제 근로자이지만 일정 조직에 속하지 않아 자영업자로 취급받는다. 우버 기사들이 대표적 사례다.

 경제 전문가들은 현재 미국의 노동시장에서 임시직이 차지하는 비중을 5%에서 최대 20%로 추정한다. 그 비중은 최근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앞으로 10년 내 40%까지 커질 것이란 예상도 나온다. 이런 추세라면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한꺼번에 쪼그라들고, 임시직이 대세로 자리 잡을 것이란 예측까지 가능해진다. 노동 패러다임의 대전환인 셈이다.

 기업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공급 과잉의 글로벌 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들은 비용 절감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핵심 기술개발·디자인·전략·마케팅 부문 등을 제외하고는 아웃소싱이 대세다. 자체 공장을 두지 않는 기업이 갈수록 늘고 있다. 모바일 플랫폼의 확산은 질 좋은 일자리보다는 허드렛일만 늘리는 추세다. 게다가 인공지능 컴퓨터와 로봇, 드론과 3D프린터의 등장은 일자리를 끊임없이 잠식할 조짐이다. 인간이 일자리를 놓고 기계와 본격 경쟁하는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기업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 재능 하나로 날품을 팔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은 법상 근로자가 아니기 때문에 노동 관련법이 보장하는 권리와 보험·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한다. 이 문제는 급기야 미 대선의 이슈로까지 떠올랐다. 민주당 대선주자 힐러리 클린턴은 “고용 안정성이 보장되지 않는 임시직 근로자들의 불리한 처우를 개선해 주겠다”고 말했다. 반면 공화당의 주자들은 “기그 경제가 비용을 낮추고 일자리를 늘리는 효과를 낳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국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창조경제와 구조개혁의 롤모델로 삼고 있는 게 바로 미국 아닌가. 그런 미국이 저 정도라면 한국의 미래도 가늠이 된다. 정규직 일자리는 좀처럼 늘지 않고 비정규직·임시직만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나마 남아 있는 좋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구조개혁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내수 서비스업 일자리가 늘어날 환경을 서둘러 조성해야 한다. 불가피한 기그 경제 확대에 대응해 임시직의 권익과 복지를 위한 제도 마련이 요구된다. 특히 청년들을 위해 정부가 직접 나서 사회적 일자리와 임대주택 등을 제공하는 획기적 대책이 필요하겠다.

 교육 시스템의 개혁도 절실하다. 대학 졸업장이 평생 직장을 찾아주던 시절은 끝났다. 대학은 고성장 시대에 맞춘 표준형 인력을 양산하던 데서 벗어나 창의적 인재를 키우는 데 주력해야 한다. 고교입시제를 부활해 젊은이들이 재능과 실력에 따라 평생 직업을 좀 더 빨리 찾아가도록 하는 것도 방법이다. 자기 기술과 재주를 확실히 가진 인재라면 기그 경제를 거꾸로 즐기며 살 수 있다. 조직의 굴레에서 벗어나 일을 압축적으로 하고, 남은 여가를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이든 개인이든 미래는 트렌드를 읽고 준비하는 자들의 몫이다.

김광기 중앙일보시사미디어 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