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한·일 정상회담으로 지핀 대화 불씨 살려가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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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3년 반 만에 어제 열린 한·일 정상회담이 양국 간의 입장 차를 재확인한 채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이번 만남은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간의 첫 공식 정상회담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사, 특히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골 깊은 견해 차로 돌파구가 마련되긴 힘들 거란 전망이 우세했다. 정상회담이라면 으레 따라야 할 공동성명과 기자회견은 물론 오·만찬까지 빠진 것도 이런 비관적인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을 게다.

 예상대로 양국 정상은 “빠른 시간 내에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협의를 가속화한다”는 원론적 수준의 합의를 이뤄냈을 뿐 실질적인 해결방안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동안 한·일 간 국장급 협의가 아홉 차례나 이뤄졌다고는 하나 양국 정상의 태도에선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박 대통령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고 우리 국민이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조속히 해결돼야 한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했다. 아베 총리 역시 “미래지향적인 협력관계를 구축해 장래 세대에 장해를 줘서는 안 된다”는 그간의 발언을 계속했다. 그는 이어 산케이 지국장에 대한 사법처리, 강제 징용 등 다른 현안에 대해서도 일본 측 입장을 개진했다고 일본 기자들에게 털어놨다. 한마디로 양측 모두 하고 싶은 이야기만 풀어놓은 형국이다.

 이런 터라 야당을 중심으로 “실패한 회담”이란 비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꼭 부정적으로만 생각할 일도 아니다. 이번 회담의 목표를 꽉 막혔던 한·일 정상 간의 말길 트기로 잡는다면 나름 성과를 이뤘다고 보는 게 맞다. 노무현-고이즈미, 이명박-노다 간 회담처럼 서로 얼굴을 붉힌 채 끝난 한·일 정상회담도 적지 않았다. 그간 험악했던 양국 분위기를 감안해 보면 파국 없이 무사히 마무리된 것 자체도 나름 평가받을 일이다.

 이번 회담을 기점으로 양국 관계는 경색 국면에서 해결책을 찾는 탐색 모드로 접어들었다. 얼어붙은 양국 관계를 녹일 뜻이 있다면 양국 정상은 앞으로도 자주 만나 이야기하는 게 옳다. 올해 말까지 APEC·G20 회의 등 몇 차례의 정상회의가 예정돼 있다. 이런 다자회의 자리를 대화의 기회로 활용해 봄 직하다.

 작금의 동아시아 정세 아래에서 한·일 관계는 양국 간 문제로만 봐선 곤란하다. 북핵 문제에다 미·중, 중·일 간 갈등이 복잡하게 뒤엉킨 동아시아 지역에서 평화와 번영이 지속되려면 미국이 든든한 버팀목으로 남아야 한다. 미국이 제 몫을 하려면 한·미·일 3각동맹이 원활하게 돌아가야 하며 이를 위한 한·일 간 협력은 필요조건이다. 지난 1일 한·중·일 3국 정상회담에서 거론됐듯 동북아 경제공동체가 건설될 경우 우리가 얻을 혜택은 엄청날 것이다. 이 역시 한·일, 중·일 간 신뢰 회복이 전제조건이다.

 박 대통령은 한·중·일 정상 만찬에서 “비가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했다. 그의 덕담처럼 한·일 관계 역시 하루빨리 갈등을 딛고 더욱 굳건해지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