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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내 한중일 정상 만찬, 그 숨은 뜻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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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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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참석한 적이 있다. 늘 그렇듯 환영 만찬도 열렸는데 장소가 특이했다. 대영박물관 내 이집트 유물 전시실이라는 거였다. 뭘 먹었는지는 전혀 생각나지 않지만 어두운 불빛 아래 괴괴했던 짐승 머리 석상들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인상적인 만찬이 주최 측 의도였다면 확실히 성공한 셈이다.

  외교의 첫걸음은 의전이고 그 의전의 꽃은 만찬으로 통한다. 온갖 수단이 동원되는 외교이기에 공식회의 이상으로 오ㆍ만찬 행사는 중요하다. 아름다운 음식에다 술까지 곁들여지면 흡족해진 참석자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속마음도 털어놓기 마련이다. 특히 정상간 오ㆍ만찬은 상대방에 대한 주최국의 감정을 표현하는 기회로 활용된다.

  그러기에 현실주의 국제정치학의 아버지 한스 모겐소는 “만찬장이야말로 국가의 생존을 좌우하는 결정적 장소”라고 설파한 바 있다. 나아가 각 나라 국력 사이의 구도가 세상을 움직이며 이런 힘의 판세는 정상 만찬과 같은 의전행사에서 확실히 표출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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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지난 9월 미국을 방문한 시진핑 중국 주석을 위해 백악관은 말레이시아계 스타 셰프 애니타 로를 불러 특별메뉴를 준비했다. 로는 바닷가재, 양고기 요리와 함께 초콜렛으로 만든 빨간색의 중국풍 정자와 다리를 디저트로 내놔 시 주석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떨어진 두 곳을 잇는 게 다리인지라 양국 간의 활발한 교류를 기대한다는 의미였다.  반면 광우병이 한창이던 1996년 영국 정부는 런던을 방문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에게 자국산 쇠고기를 내놨다. 누가 봐도 영국산 쇠고기 수입금지에 대한 항의였다.

자리 배치도 극히 민감한 사안이다. 어디 앉느냐가 그 나라 위상의 바로미터라고 여겨지는 탓이다. 2009년 런던에서 열린 G20 만찬에서는 영국ㆍ이탈리아 총리가 갓 취임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근처에 못 앉으면 나가겠다고 우겨 결국 뜻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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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ㆍ만찬 장소 역시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1961년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한 모함마드 칸 파키스탄 대통령은 미국 국부로 추앙 받는 조지 워싱턴의 생가에서 저녁을 해야 한다고 요구, 미국 측을 난처하게 했다. 전례 없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자신 역시 파키스탄의 국부임을 과시하고 싶어했던 칸 대통령은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번 한중일 정상들이 참석한 환영만찬이 1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다. 문화적 공간이야말로 세 나라 관계를 개선시큰 데 도움이 될 최적의 만찬 장소라고 판단된 모양이다.  미술관에서 국가적 행사가 열린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2년 핵안보정상회담 때 정상들의 배우자를 위한 만찬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다. 국보급 문화재를 망가뜨릴 수 있는 만찬이 웬 말이냐는 반대도 심했다. 음식을 준비하고 나르는 과정에서 문화재에 해를 입힐 습기 등이 나온다는 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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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서울 핵안보정상회의 배우자 만찬에서 김윤옥 여사가 정상배우자들에게 인삿말을 하고있다 [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외국 유명 미술관 내 만찬은 흔한 일이다. 대영박물관은 물론 영국 내셔널갤러리도 각 전시실에서 몇 명의 식사가 가능한지 광고할 정도다. 1989년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G7 만찬이 열렸으며 2013년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때 정상 만찬이 열린 곳도 스미소니언 박물관이었다. 다기능이 각광 받는 시대다. 박물관ㆍ미술관 같은 문화시설 역시 그저 바라만 볼게 아니라 여러모로 활용하는 게 지혜 아닐까.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