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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초점] 친박계 일각 떠도는 장기집권플랜-이원집정부제 개헌론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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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반기문은 이원집정부제 대통령 카드?

내년 총선 이후 여야 합의에 따른 개헌 통해 친박계 총리 선출 시나리오 고개 들어… 靑-김무성 간 밀고 당기는 싸움은 계보 몸집 불리기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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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9월 26일 유엔본부에서 열린 새마을운동 관련 행사에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함께 참석했다. / 사진·중앙포토


박근혜 대통령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공천룰 갈등 이후 처음으로 환한 얼굴로 악수를 하는 장면이 10월 13일 카메라에 잡혔다. 방미(訪美) 외교에 나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환송하고자 김 대표가 직접 배웅에 나선 성남 서울공항에서다. 9월 말만 해도 박 대통령이 유엔총회 참석을 마치고 귀국하던 서울공항에 김 대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출국 때도 마찬가지였다. 둘 사이엔 그렇게 냉기류가 흘렀었다.

하지만 이날 서울공항에서 손을 잡음으로써 그간의 불편했던 관계가 상당부분 해소됐으리라는 관측을 낳았다. 김 대표도 “대통령과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눴다”면서도 “내용은 비밀”이라고만 언급해 궁금증을 유발했다. 공천룰을 둘러싼 당청 갈등이 봉합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성급한 추측도 나왔다.

공천룰을 놓고 한때 원색적 비난과 함께 극한 대립을 보였던 청와대와 김 대표가 정말로 화해 무드에 접어든 걸까? 익명을 요구한 친박계의 한 핵심 인사는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당청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것이다. 현안을 놓고 계속 충돌할 것이다. 김 대표가 위로 치받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김 대표가 치받으면 청와대는 누르고 하는 일이 되풀이될 게 분명하다.” 청와대와 김 대표 사이에 신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박 대통령의 정무특보 김재원 의원의 10월 7일자 <중앙일보> 인터뷰를 봐도 갈등 요인이 엄존함을 알 수 있다. 그는 “청와대가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건 대통령이 공천 지분을 요구하는 것처럼 김 대표 주변에서 말을 만들어냈고 그걸 청와대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박 대통령이 김 대표 측의 행보를 못마땅해한다는 해석을 낳았다. 나아가 김 의원은 “대통령이 지분을 요구하거나 공천룰에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면서도 “19대 국회가 최악의 국회란 오명을 받고 있는데 현역 의원들에게 유리하게 공천이 이뤄진다면 청와대나 언론이 문제의식을 갖고 지적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여운을 남겼다.


대통령의 3 요소: 스토리·마니아·확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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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19대 마지막 정기국회 개회식. 재적의원의 3분의 2(200명)가 동의하면 개헌이 가능하다. / 사진·중앙포토


원래 공천은 국회의원과 계파의 생사가 걸린 문제다. 새누리당 내 친박계 한 관계자는 “이는 계속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라고 했다. 최근 청와대와 김 대표의 관계는 “전쟁으로 치자면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면서 뒤로 물러서는 형국”에 비유했다. 몇 발짝 물러섰다 해도 결국 사정거리 안에 있으며, 어떤 계기로 한쪽에서 먼저 격발하면 난사로 이어지는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는 근본적인 싸움이라 한치의 양보도 있을 수 없다는 걸 여권이 더 잘 안다고 이 관계자는 전했다.

총선 공천은 20대 국회의 의석 분포에만 국한되는 사안이 아니다. 내년 후반기 조성될 수도 있는 개헌 국면의 양상을 좌우할 최대 변수이기도 하다. 누가 다수당이 되는가? 어느 계파가 최대 의석을 갖느냐에 따라 정국 주도권이 넘어간다. 계파의 이익을 챙기는 차원에서라도 공천룰 싸움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친박계 내부에서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이 화제에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모은다.

이원집정부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지난해 10월 중국을 방문한 자리에서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가 청와대로부터 된서리를 맞고 하루 만에 사과했던 그 제도다. 당시 박 대통령은 “개헌논의가 국가 역량을 분산할 경우 경제 블랙홀을 유발할 수 있다”며 개헌논의에 족쇄를 채운 상태였다. 이후 여권에서 ‘개헌’이라는 단어는 ‘금기어’로 봉인된 상태다.

이런 마당에서의 개헌 언급은 생뚱맞은 발상 또는 일방적 주장으로 폄하되기 십상이다. 이원집정부제 개헌 주장은 자칫 잘못 얘기했다가는 당장 ‘파문’될 수도 있는 중대한 일탈에 해당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 주변 인사들조차 사석에서 개헌문제를 입에 올리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일부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염두에 둔 이원집정부제를 유력한 대안 권력구조로 민다는 말까지 들린다.

먼저 올 상반기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일익을 담당한 친박계의 한 책사가 내놓은 차기 구도와 관련된 전망을 들어 보자. 그는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스토리 ▷마니아 ▷확장성이라는 3개 요소를 갖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인으로 성장하기까지의 뭉클한 감동을 주는 여정이 뚜렷해야 한다. 또 어떤 경우에도 열정을 갖고 밀어주는 강고한 지지층이 필수다. 여기에 중간층의 표심을 파고드는 확장성을 갖춰야 비로소 대통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 오른다는 게 역대 대선 승리가 주는 교훈이라고 했다.

이에 부합하는 인물이 바로 반 총장이라는 게 이 책사의 관점이다.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세계를 무대로 하는 유엔사무총장에 이르는 그의 여정은 자수성가의 전형이라 하겠다. 고교시절 적십자사에서 주최한 영어 웅변대회 입상을 계기로 미국을 방문해 존 F. 케네디 대통령을 만났던 그가 대선에 도전하는 건 서사적 감동(스토리)을 준다. 또 ‘충청대망론’으로 대별되는 충청 대선주자 희구심리는 충청 출신인 반 총장에게 강력한 팬덤(fandom, 마니아)을 제공한다. 그의 스토리가 알려지면 20·30대 젊은층들이 반 총장을 싫어할까? 대통령으로서의 덕목이나 자질을 논외로 하고서도 그는 대통령이 되는 객관적 조건을 갖춘 인물 중 하나다.” 9월 유엔을 방문한 박 대통령이 반 총장과 총 일곱 차례나 만나면서 친밀감을 과시하기 훨씬 이전부터 반 총장은 여권 차기 대선주자로 주목받았음을 알 수 있다.


반기문 총장 향한 친박계의 엇갈리는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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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참여를 갈망하는 정당일수록 분권형 개헌에 관심을 둔다. 국회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에 150명이 넘는 의원이 참여했다. / 사진·중앙포토

그런데 정치권에서 친박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한 핵심 의원은 반 총장의 가능성에 큰 무게를 두지 않았다. 지난 8월 초 이 의원은 “나는 반기문 카드는 아니라고 본다”면서 “영입에 성공해도 정치권에 뿌리가 없으면 대통령이 되기는 어렵다”며 반 총장을 대수롭지 않게 치부했다. 심지어 그는 “여권에서 심도 있게 검토한 적이 없다”고도 잘라 말했다. 이런 입장은 최근까지도 변함이 없다고 이 의원은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 모두 친박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사들인데도 반 총장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서로 말이 엇갈린다. 아직 차기 대선에 대한 친박계 내부의 공통된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았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일 수도 있다.

박 대통령 주변 동향을 잘 아는 정부측 인사는 이와 관련해 “결국 반 총장은 반쪽짜리 대통령감”이라는 견해를 펼쳤다. 국정 전반에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지금의 제왕적 대통령이 아닌 외교·안보·통일 등 외치(外治)를 담당하는 대통령에 더 어울린다는 말이다. 이 인사는 “내치(內治)를 배제한 외치만 놓고 본다면 반 총장의 대통령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도 강조했다. 반 총장의 이력으로 볼 때 이런 분석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앞서 친박계 핵심 의원이 말한 ‘정치권 내 기반 부재’도 외치를 담당하는 대통령에게는 그리 큰 흠결 요인이 되지 않는다. 이 인사는 “퍼즐을 맞춰보면 결국 그런 그림이 된다”면서 내치와 외치를 구분하는 이원집정부제 아래의 ‘반기문 대통령’ 시나리오를 제시했다. ‘현행 대통령제-내치=이원집정부제 하의 대통령’의 등식이 성립하며 그 자리에 반 총장이 적임자라는 것이다.

주류 진영 내 권력 승계는 배신과 단죄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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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말 새누리당 친박계 인사들의 송년 모임. 친박계 일각에서도 이원집정부제 개헌에 대한 관심이 고개를 든다. / 사진·중앙포토

이 인사는 박 대통령 친위그룹 일각의 기류가 그렇다고 했다. 그는 이렇게 전했다. “박 대통령의 입장은 분명하다. 대선 당시 대통령 4년 중임제 공약을 내세웠다. 지금은 국정 현안에 집중해야 하므로 국력을 분산케 하는 개헌논의를 용납하지 않는다. 대통령은 여기까지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참모들은 더 먼 미래를 그려야 한다. 내년 총선 이후 대선 너머까지를 봐야 하는 게 참모의 역할이다. 대통령의 의식구조를 이해하는 참모들은 퇴임 후 박근혜·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정 철학과 유업이 부정당하지 않는 정권의 출현을 선호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기틀을 닦은 한국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고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을 세력이 계속 집권하면 금상첨화다.” 적어도 박 대통령을 부정하지 않는 세력, 나아가 경제를 통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세력의 집권이 박 대통령과 대한민국에 이롭다는 상황인식이다. 그 방법론의 하나로 이원집정부제 개헌이 거론된다고 이 인사는 전한다.

이유는 역설적이다. 한국 사회에서 주류가 정권재창출을 통해 성공한 예가 극히 드물다고 했다. 현행 대통령제 권력 구조에서 집권세력이 정권을 재창출하더라도 반드시 후임 대통령이 전임 대통령을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가 그랬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도 되풀이됐다. 자신이 낙점한 후계자로부터 뒤통수를 맞은 이도 있다. 차라리 비주류인 김대중 정부에 정권이 넘어간 김영삼 전 대통령은 화를 면했다. 주류 진영 내 권력 승계는 이처럼 배신과 단죄의 역사로 기록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인사는 이렇게 전했다. “박근혜 정부 이후의 정부라 해서 달라질 게 있을까? 정권재창출에 의해 탄생된 후임 대통령도 전임 대통령과 선을 그을 것이다. 지금이야 박 대통령이 개인적 인기로 자신의 국정 철학과 정책 노선을 지탱하지만 후임자는 그럴 이유도, 능력도 의문시된다. 더구나 대통령 주변의 실권자, 측근들이 전직 대통령을 가만두지 않는다. 그가 설령 반기문 총장이라도 예외는 없다. 이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숙명이다.”

특히나 박 대통령과 같이 ‘신뢰’와 ‘원칙’을 강조하는 스타일일수록 이 문제에 더 민감할 수 있다. 윤상현 의원은 언젠가 여권 차기 주자의 덕목과 관련해 “여러 가지 자질과 조건 중에서 박 대통령은 신의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성공적인 국정운영을 정권재창출과 동전의 양면이라 여기는 친박계는 박 대통령의 후계자가 배신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를 만들고 싶어한다. 이 점은 박 대통령을 오래 모신 사람일수록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대목이기도 하다.

단순히 새누리당의 정권재창출만으로 대통령을 모시는 소임을 다했다고 보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통령의 의중과 무관하게 일부 측근 참모가 그 대안으로 상정하는 게 바로 이원집정부제 권력구조라는 것이다. 외치는 대통령, 내치는 총리가 책임지는 이원집정부제에서는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집권자가 존재할 수 없다. 권력이 반으로 줄어든 정권 담당자 등은 퇴임 후에도 대구·경북(TK) 등 영남권과 고령층의 지지를 받는 박 대통령을 함부로 대할 수 없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국회의원들도 퇴임 후에도 영향력이 사그라지지 않는 박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퇴임 후의 정치? 좀 황당하지만 친박계 일각에서는 진지한 화두로 받아들이기도 한다. 보통은 현직 대통령의 국정지지율이 관심의 대상이 됐을 뿐이다. 한국에서 퇴임 후의 영향력이니 정치력이니 하는 말이 가당키나 한 걸까? 친박계 내부에서는 이런 얘기도 나돌았다고 한다. “차기 대선에서 누군가를 대리로 세워놓고 차차기에 복귀하는 게 법적으로 불가능한 건 아니다. 박 대통령이 대선에 다시 나올 분은 절대 아니지만 나라가 결딴나고 국민이 간절히 바란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애국과 구국하는 길이다.”

이원집정부제 아래의 친박계 총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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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전국 시장·군수·구청장협의회 주최로 수원에서 열린 개헌 관련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개헌 당위성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총리-대통령 권력분점 구도에서 지역간 연대의 틀도 마련된다. 즉 충청 출신 대통령과 TK 출신 총리론이다. 예를 들면 ‘반기문 대통령+최경환 국무총리’ 조합이 가능하다. 대통령은 국민이 직접 선출하고 총리는 국회 다수당의 수장이 차지하는 식이다. 지난해 청와대가 김 대표의 오스트리아식 이원집정부제에 제동을 건 것도 이의 연장선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김 대표가 개헌이라는 거대 담론으로 정국을 주도하는 걸 청와대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사표시일 뿐 개헌 자체를 완전 배제한 것은 아니라는 관점이다.

‘공허한 박근혜 만능주의’, ‘몽상가의 황당한 상상력’ 정도로 일축될 법도 하지만 발상이 나오게 된 배경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의 진단은 한 가지 착안점을 제공한다. 그는 최근 “박 대통령의 퇴임 후는 아주 불안한 상황”이라고 관측했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박 대통령의 국정과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업까지 모두 부정당하는 사태가 올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심지어 반기문 총장 조차도 (현행 대통령제 아래서) 대통령이 되면 완전 딴사람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래서 반 총장도 믿지 못할 바에야 의석이 확보되면 이원집정부제와 같은 분권형 개헌의 유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믿을 사람은 결국 공동운명체인 친박계 최측근이기에 이원집정부제 아래 친박계 총리론이 여권 내부에서 거론된다”고 말했다.

지금은 박 대통령과 완전히 멀어졌지만 한때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활동했던 이상돈 교수는 9월 17일 YTN 라디오 <신율의 출발 새아침>과의 인터뷰에서도 “시중에 들리는 말대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을 외교 대통령으로 해서…”라며 “이원집정부처럼 되면 친박에서도 총리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총선에서 야당이 지리멸렬해서 100석도 못 얻으면 개헌선이 돌파된다”고 언급했다.

총선과 개헌이 불가분 관계라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원유철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최근 언론에 한 말을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그는 내년 총선 의석 목표로 180석을 제시했다. 여권은 소수당이 반대하면 법안 통과를 어렵게 한 국회법(이른바 ‘국회 선진화법’)을 개정하고자 한다. 새누리당의 힘만으로 개정하는데 필요한 의석이 180석(재적의원 5분의 3 이상 찬성)이다. 한 발 더 나아가 20석만 더하면 개헌 의결 정족수(재적의원 3분의 2)까지 채운다. 새누리당의 힘만으로 개헌을 밀어붙일 수 있다. 새누리당이 꼭 200석을 가져야만 개헌이 가능한 건 아니다. 야당 일부가 동의하면 개헌 정족수를 채울 수 있다.

박 대통령이 주도해 정권을 재창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 확산되는 것도 개헌론의 자양분이 된다. 9월 이후 40% 선을 훨씬 웃도는 국정지지율이 든든한 버팀목이다. 한때 아래로 출렁이던 국정지지율이 강력한 복원력을 보여주면서 이런 믿음은 확신으로 이어졌다. 이 지지율은 내년 총선과 그 이후의 정국주도권을 보증한다.

친박계의 생존전략이 이와 맞닿아 있다. 친박계는 권력을 창출한 계보임에도 당내 소수파이자 스스로가 어젠다를 만들어 끌어가는 힘이 미약하다. 박 대통령이 이대로 퇴임하면 친박계는 극소수 계파로 전락하거나 아예 소멸할 운명이라는 비아냥도 받는다. 그래서 몰락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게 지금의 공천룰 싸움의 한 배경이라고 황태순 정치평론가는 말한다. 황 평론가는 “공천룰 싸움의 근저에는 공천 지분을 극대화하려는 당내 파벌의 생존 본능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도 공감하지만 지금은 시기가 아닐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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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3일 방미 일정에 나선 박근혜 대통령이 성남 서울공항에서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인사를 나누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예컨대 새누리당이 목표로 하는 180석 중에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핵심 친박계가 70석 정도만 획득해도 전체 의석의 4분의 1에 가까운 독자 세력을 형성한다. 대구·경북, 부산·경남, 충청, 강원, 수도권 일부 등에서 친박 직계 의원들이 당선되면 권역별로 친박계 형성도 가능하다. 대선주자 반열에는 들지 못해도 총리 반열에 속하는 이들이 친박계에는 제법 있다. 황교안 총리, 최경환 부총리 등 박 대통령이 신뢰하는 이들이 계보의 몫으로 총리에 도전할 수가 있다. 이게 친박계에는 이원집정부제의 장점이기도 하다. 연장선상에서 지난해 친박계는 대통령이 국정동력을 확보하자면 20대 국회 적어도 40~50명의 친위세력을 구축해야 한다는 의견을 모은 적도 있다고 알려졌다.

청와대의 한 언론인 출신 참모는 이런 류의 친위세력 구축론에 대해 “그건 친박 의원들이 자기 좋자고 하는 말”이라며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을 잘해서 그 후광으로 미래를 도모할 분이지 친위세력 운운할 분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이렇듯 개헌론은 청와대 내에서도 극히 일부만 공유하는 의제라고 한다. 청와대 내 고위 관계자들조차 이런 논의 구조에 참여하지 못할뿐더러 존재 자체를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개헌론은 청와대 내 주류적 흐름은 아닐지라도 권력의 본질을 아는 이들의 뇌리에는 굳건히 자리 잡은 정국의 한 청사진으로 분류되는 게 현실이다.

개헌이 과연 가능한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친박계에서 일찍이 개헌 필요성이 제기됐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현상이다. 강창희 전 국회의장이 의장 시절 국회 헌법개정자문위에서 받은 보고서에도 분권형 대통령제가 담겨 있다. 강 전 의장은 2013년 7월 제헌철 경축사에서 “개헌은 2014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공론화해서 19대 국회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옳다”고도 했다.

김무성 대표의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에 강하게 반발했던 친박계 김태호 새누리당 최고위원도 개헌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다만 국민이 뽑은 박 대통령이 원치 않는 방식과 시기의 개헌논의에 반대한다는 입장이다. 노동·교육 등 국가적 개혁과제 실행에 힘을 기울여야 할 지금 개헌논의로 역량을 분산시켜서는 곤란하다는 이유에서다. 그도 개헌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박 대통령도 개헌을 통한 정치권 변화와 개혁에 공감한다고 본다. 단지 지금은 시기가 아닌 것이다. 지금의 헌법은 미래 사회의 담론과 과제를 다 담기에는 그릇이 작다. 승자독식 구조가 아닌 협치가 가능한 4년 중임 정·부통령제가 남북·지역갈등을 해소하는 데 적합한 리더십을 제공하리라 본다.”

공개적으로 이원집정부제를 지지하는 이도 적지 않다. 친박계로 분류되는 경북의 이철우 의원 같은 이가 그런 경우다. 김천을 지역구로 둔 그는 중앙에 과도하게 집중된 권력을 지방으로 내려보내기 위해서라도 개헌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이원집정부제를 선호한다. 그는 “‘승자독식’의 대선 이후 나라가 두 동강 나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의원이 야당에도 많다”며 정치권내 공감대는 이미 형성돼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총선 후 청와대와의 교감만 된다면 연내 개헌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며 속전속결식의 개헌 가능성도 내다봤다. 여야 의원 150여 명이 참여하는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도 있다. 4년 중임제든, 내각제든, 이원집정부제이든 현행 권력구조의 변경을 원하는 의원들이 국회 의석의 과반을 차지한다.

차기 주자 중에서도 분권형 개헌에 동의할 수도

야당에서도 제왕적 대통령제와 단임제의 폐해를 들어 개헌의 필요성에 동의하는 이가 많다. 야권도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시각이 확산될수록 권력을 나누는 개헌에 눈길을 주기 마련이다. ‘기울어진 운동장론’에서 벗어나 국정운영에 참여하는 길을 이원집정부제에서 찾자는 의견이 고개를 들 수도 있다.

개헌은 박 대통령이 동의해야 하고 특히 분권형으로 가자면 차기 대선주자들이 호응해야 탄력을 받을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4년 중임제 개헌 공약을 내걸었다. 원칙적으로 개헌불가론자는 아니다. 현 시점의 개헌론에 반대할 뿐이다. 집권 후반기 개헌도 하자면 가능하다. 일반적으로 개헌 얘기가 정치권 이슈로 등장하는 순간 대통령의 지도력은 내리막길을 걷는 걸로 인식된다. 개헌논의의 장인 국회에 국민의 시선이 집중되면서 대통령의 국정운영은 관심권 밖으로 밀린다는 이유에서다. 레임덕을 가속화한다는 우려다. 이상돈 교수는 친박계 내부의 이원집정부제 논의와는 별개로 “개헌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에서의 개헌은 4·19 혁명, 5·16 군사정변, 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같은 큼직한 모멘텀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고 했다.

정반대의 결과도 예상할 수 있다. 집권 후반기에는 통상 대통령 지지율이 떨어지게 마련이고, 차기 주자들의 목소리는 높아져간다. 이때 만약 이원집정부제 개헌이 대세로 자리 잡으면 대통령의 레임덕을 늦추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차기 주자들도 새로운 권력구조 아래서 대통령 혹은 총리에 도전해야 하므로 개헌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다. 목청을 높이고 줄세우기를 하기보다는 자세를 낮추고 정국을 관망하는 모드로 접어들게 된다는 말이다. 차기 주자들에게 급격하게 쏠리던 힘의 균형추가 대통령에게 머무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늘어난다는 게 개헌론자들의 분석이다.

차기 주자라고 해서 반드시 현행 대통령제에 집착하는 건 아니다. 당장 새누리당의 유력한 차기 주자인 김무성 대표부터가 이원집정부제 개헌론자다. 10월 6일 광복 70주년 관련 세미나에서 김무성 대표는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은 정치적으로 1987년 체제를, 경제적으로 1997년 체제를 극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라며 불을 또 지폈다. 87년 체제란 5년 단임제를 근간으로 하는 현행 헌법체제를 일컫는 말이다. 이와 관련해 박명호 동국대 교수는 차기 주자들이 분권형 개헌을 꼭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현행 대통령제 하에서 당선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주자는 분권형 개헌 쪽으로 방향을 틀 수도 있다. 또 여야는 공히 권력 참여를 갈망한다. 권력을 나누는 개헌에 기본적으로 인식을 공유한다.” 그래서 내년 총선 이후 개헌논의가 수면 위로 떠오른다는 게 박 교수의 전망이다.

현 시점 개헌논의를 막는 쪽은 박 대통령과 친박계 등 집권 세력이다. 총선 이후 친박계가 마음을 달리 먹는다면 개헌론은 급물살을 타게 되는 구조다. 여권 내 ‘개헌논의 금지’라는 봉인이 풀리는 날 한국 정치에 일대 격변이 올 수도 있다.

- 박성현 월간중앙 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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