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대표가 만든 법안, 귀족이 부결 … 캐머런 “헌법 위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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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머런 영국 총리

“헌법 위기다.”(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상원, 감세 축소법 제동에 재정 비상
비선출직 … 관례 깨고 재정법 손대
귀족이 720명, 절반은 70세 넘어
캐머런, 100년 만의 상원 개혁 시동

 “상원이 민주주의를 허물고 있다.”(데일리 텔레그래프)

 영국을 달구는 목소리들이다. 상원이 44억 파운드(7조6000억원)에 달하는 세금 감면을 취소하는 내용의 정부 세제 개편안을 부결시킨 후다. 진보 성향의 가디언 정도만 “상원의원들이 적절한 압력을 행사했다”고 감쌌다.

 언뜻 보기엔 별스럽지 않은 일로 보인다. 하원이 통과시킨 법안을 상원이 튼 것이어서다. 상원은 26일 4시간 여 토론 끝에 307 대 277로 세제개편안을 부결했다. 저소득층 가정도 연간 1300파운드(225만원)을 더 내야한다는 비판론이 먹혔다. 노동당의 패트리샤 홀리스 상원의원은 “저소득층 가구에 성탄절을 앞두고 선물은 못 줄망정 연간 1300 파운드를 손해볼 것이라는 편지를 보낼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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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과 성직자 등으로 구성된 영국 상원의원들. 일부는 가발 착용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집권당인 보수당의 조지 오즈본 재무장관이 “노동당 정부 시절 도입된 세금 감면 조치에 이젠 연간 300억 파운드(51조8000억원)나 든다”며 “재정 여건 상 더이상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다. 생활 임금을 올리는 식으로 보완 가능하다”고 맞섰지만 통하지 않았다.

 양원제 국가에선 늘상 있는 일이려니 하겠지만 영국에선 “100년 만에 벌어진 일”이다. 여기엔 선출직 대 비선출직, 국민의 대표 대 귀족 간 오랜 갈등의 역사가 있다. 영국식 대의민주주의의 성장사다. 국민의 대표가 왕과 귀족들과 싸웠다. 핵심은 ‘대표 없이 조세 없다’는 정신이다. 국민의 대표 기관인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이 부과될 수 없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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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628년 하원의원들이 찰스 1세에게 과중한 과세에 항의해 문서를 제출했다. 오늘날 권리청원으로 불리는 문서다. 찰스 1세는 하원의원 5명을 체포하고 폭정을 하다 결국 처형됐다. 청교도 혁명이다. 1689년 명예혁명이 낳은 권리장전도, 미국 독립 전쟁도 유사한 맥락이다.

 여기에서 국민의 대표는 선출직을 가리킨다. 영국 의회에선 하원만 선출직이다. 상원은 귀족들이거나 종교 지도자들로 구성돼 있다. ‘국민의 대표’가 아니란 의미다. 이때문에 상원은 법안 수정 권한만 갖는다. 이번 사태에 영국 언론들이 “비선출직이 재정 법안에 손을 댔다”고 깜짝 놀라는 이유다.

 20세기의 사례도 있다. 1909년 자유당 출신 총리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복지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이른바 ‘국민예산’이란 걸 마련했는데 상원이 부결시켰다. 격노한 하원이 2년 뒤 상원의 권한을 축소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특히 재정 법안에 손을 못 댄다는 불문 헌법이 확정된 계기였다.

 상원 개혁 논의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단 숫자가 너무 많다. 2010년 700명이었는데 근래엔 816명으로 늘었다. 각당이 경쟁적으로 지지자들을 귀족으로 만들어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일당 만 하루 300파운드다. 영국 내에선 “중국을 빼곤 가장 큰 의회”란 비아냥이 있다. 정당 구성 자체도 선거 민심을 대변한다고 보기 어렵다. 의원 절반 이상이 70세 이상이다.

 그럼에도 매번 개혁 논의가 흐지부지되곤 했는데 뉴욕타임스는 “상원을 선출직으로 바꿀 경우 미국과 상·하원처럼 갈등하느라 아무 일도 못하게 될 수 있다는 공포가 있다”며 “정당으로선 지지자들을 챙긴다는 잇점도 있다”고 해석했다.

 이번엔 그러나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 듯하다. 캐머런 총리가 당장 헌법적 검토에 들어가도록 했다. 아예 의회법을 개정해서 재정 법안에 손을 못대도록 할 것이란 분석이 우세하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 이은 데이비드 캐머런의 상원 개혁이 될 수도 있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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