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평전'풍도의 길'은 '중국사 희대의 간신(奸臣) 구하기'에 바쳐진 저술이다. 다섯개 왕조의 열한명의 군주를 차례로 섬긴 인물, 그래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개와는 담을 쌓았던 사람인 풍도(馮道.882~954.초상화)가 이 책에서 조명받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의 입장은 '자치통감'을 남긴 사마광의 인물 평가를 정면에서 뒤집는 쪽을 선택하고있다.
"정절을 지키는 여인은 두 지아비를 따르지않고, 충성스런 신하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 풍도가 착한 일 몇가지 했다한들 어찌 괜찮다고 말하겠는가?" 사마광은 이런 단언으로 풍도에 대한 후세의 판단을 일찌감치 규정해둔 핵심이다.
그러나 이 책을 지은 도나미 마모루(전 교토대 교수)는 설득력있는 '풍도 복권'작업에 몰입한다. 사마광은 11세기 송나라 사학의 우두머리. 즉 유학이 관학(官學)으로 자리잡는 과정이었고, 이때 불사이군라는 유교적 정치윤리를 위해 풍도를 희생양으로 만들었다는게 저자의 시선이다.
인물 평가가 이토록 가변적일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데, 우리의 관심은 일단 풍도의 실제모습일 것이다. 풍도는 이런 신념을 가졌다. "임금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
즉 주변에서 "불사이군이라는데…"하며 '오뚝이 풍도'의 속마음을 떠보려는 이들에게 그가 대꾸한 말이다. 즉 풍도는 기회주의자라기 보다는 그만의 정치철학을 견지했다.
그는 처신도 신중했다. "입은 재앙을 불러들이는 문이요/혀는 몸을 베는 칼이다"'전당시(全唐詩)'에 수록된 풍도의 시 '혓바닥(舌詩)'이야말로 권력의 정글 속에서 익힌 처신의 노하우를 보여준다.
"만인과 다투지 않는다" "매사에 실무를 중시한다" 등이 이 책이 제시하는 '풍도의 길'이었다. 어떻게 그런 장수(長壽)가 가능했을까. 그것은 난세 탓이다.
당나라 멸망(907년)이후 송나라가 세워지기(960년)전까지 반세기를 명멸했던 5개 왕조 10개 나라가 각축하던 '오대십국'의 시기야말로 풍도의 시대였다. 책은 풍도가 이 난세에 백성들이 입는 참화를 줄이려 노력했음을 실증적으로 규명한다.
풍도의 문화적 치적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명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서 조지프 니덤이 밝힌대로 "풍도의 경전 인쇄작업은 훗날 송나라 르네상스를 안내하는 힘이었다"는 것이다. 이 번역서에서 우리가 덤으로 확인해볼 것은 '한국의 풍토'가 아닐까 싶다.
이웃 중국.일본 학계의 역사인물에 대한 탄력적인 평가 풍토와 또 달리 유독 한국사회는 경직된 교조적 잣대를 고집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대목 말이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중국의 넘버투이자 부도옹(不倒翁)들인 주언라이(周恩來)와 덩사오핑(鄧小平)등이 떠오르기도 한다.
조우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