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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 교수의 스트레스 클리닉] 몸은 늙는데 마음은 왜 늙지 않는 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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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 건강염려증 낳아
젊은 세대와 교류로 긍정적인 마음 충전
문화로 세대 초월…행복한 노년기 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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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살 만큼 살았다는 말은 다 거짓말

과거에 대해 잘살았다는 평가가 행복한 오늘 만들죠

한 성공한 어르신이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자신의 신체적 능력이 다 끝난 것 같아 울적하시다고요. 열심히 노력해서 사회경제적 성공을 한 것, 부럽고 멋진 일이지만 아무리 성공해도 몸이 늙어 가는 것을 막을 방법은 현재 없습니다. 항노화란 용어는 검증된 의학 용어라기보다는 늙고 싶지 않은 우리 마음의 욕구를 향한 마케팅 용어라 생각됩니다. 진실은 우리는 이 순간 늙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이제 살 만큼 산 것 같다’라 말을 던졌는데 며느리가 ‘그러게요, 후회 없으시겠어요’라고 했다가 엄청 혼이 났다고 합니다. 어르신들의 ‘살 만큼 산 것 같다’란 말은 거짓말입니다. 남은 삶이 줄어들수록 삶에 대한 애정과 집착은 더 커집니다.

지나친 삶에 대한 집착이 가져오는 마음의 병이 건강염려증입니다. 건강염려증은 오래 살고 싶은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의 본질적인 목적은 삶을 가치 있게 보내고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건강염려증이 무서운 이유는 지나치게 생존에만 집착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즐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 없는 좀비의 삶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실제로 건강염려증에 빠진 어르신께 ‘제가 앞으로 20년 무병장수하시는 것 보장하겠습니다. 자 그럼 앞으로 20년 무엇을 하며 어떻게 보내고 싶으십니까’라고 질문하면 갑자기 멍한 얼굴을 하면서 답을 하시는 분들이 거의 없습니다. 한참 있다가 ‘건강하게 살다 죽고 싶습니다’란 답이 나옵니다. 왜 건강하게 살고 싶은지, 무엇을 하기 위해 건강이 필요한지가 없습니다. 무섭고 슬픈 마음의 병입니다. 어르신들에게 찾아오는 건강염려증, 몸은 늙어도 마음은 여전히 너무나 살고 싶어한다는 증거입니다.

02 나이 들수록 감성적으로 되는 이유

왜 몸은 늙는데 마음은 늙지 않을까요. 같이 늙어가면 편할 텐데 말이죠. 몸이 사그라지면서 마음 안의 삶에 대한 욕심도 줄어들면 고민 같은 것은 없을 텐데 말이죠. 심한 건강염려도 찾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욕심이 떠나고 마음이 소탈해진다는 생각을 믿고 싶지만 사실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삶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지고 그래서 내 삶이 더 소중하고 소중하기에 내 삶이 만족스럽지 않을 때 분노와 슬픔도 더 크게 느껴지게 됩니다.

생존의 관점에서 인간 심리의 변화를 바라보는 진화심리학자의 이야기가 흥미롭습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면서 대부분 기능이 떨어져 가죠. 머리도 하얘지고 눈도 안 보이고 팔다리도 가늘어집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강력해지는 기능이 있다고 합니다. 마음의 섬세한 감성 반응입니다. 무뚝뚝한 남자도 예술가처럼 마음이 섬세해진다는 거죠. 눈물 때문에 고민이 되어 찾아오는 50대 이후 남성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우울증에 걸린 것 아니냐며 걱정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우울증에 걸린 것이 아닙니다.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와 여성화되는 것도 아닙니다. 남자가 여성보다 덜 울어야 한다는 뚜렷한 과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남성은 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육을 받다 보니 그냥 눈물을 참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찍어 누르는 힘은 약해지고 본래의 섬세한 감성이 다시 살아나면서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면서 모든 기능은 약해지는데 섬세한 감성은 살아나는 것, 동물진화심리학자는 인간에게만 이런 특징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생존의 관점에서 보면 동물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경쟁합니다. 그리고 나선 종족의 유지를 위해 생물학적 자손을 낳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투입합니다.

인간도 이런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생물학적 자손을 낳고도 한참을 더 살고 심지어 사랑이나 자유 같은 감성의 요구에 더 민감해진다는 게 다릅니다. 종족 유지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서도 사랑을 갈망합니다. 삶에 대한 욕구이고 내 존재를 느끼기 위한 사랑에 대한 욕구일 수 있습니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은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으니깐요. 나라는 정체성은 관계를 맺는 타인을 통해 정의됩니다. 나이가 들어도 관계에 대한 욕망은 줄어들지 않는 것이죠.

그래서 나이 들면서 삶이 불편해집니다. 저는 빅뱅이란 아이돌그룹의 멤버, 지드래곤이 좋습니다. 옷도 잘 입고 노래도 잘하고 노래를 잘 만들기까지 잘합니다. 멋진 친구입니다. 질투가 나기까지 합니다. 상상 속에서 지드래곤과 경쟁도 해봅니다. 그러나 제가 아무리 노력한들 지드래곤의 매력과 대결할 순 없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저보다 지드래곤을 훨씬 좋아합니다. 글을 쓰면서도 웃음이 나오네요. ‘비교할 만한 곳에 비교해라’하는 환청이 제 귀에서 들립니다. 제 현실 검증력이 아직은 정상으로 작동되는 듯해 안심이네요. 그래서 맘이 불편합니다. 내 맘은 다시 20대인데 실제 상황은 아닌 것이죠.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런 인간만이 가지는 특징을 ‘문화계승’을 위한 진화적 변화라 이야기합니다. 다른 동물들은 생물학적 자손을 낳는 것에만 맞춰 생존 프로그램이 진화됐지만 인간은 나 닮은 자손을 낳는 것으로 생존 프로그램이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문화계승 프로그램이 여기에 포함돼 있다는 것입니다. 삶의 전반부가 생존과 생물학적 자손을 얻는 치열한 전투였다면 삶의 후반부는 신체적 매력은 감소하나 문화를 통한 상징적 사랑을 하기에는 최적화된 조건이 된다는 것이죠. 문화에 몰입하여 즐기고 그것을 통해 문화를 발전 계승시키는 삶의 후반부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을 놓고 젊은 사람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사랑이 담긴 나의 세대의 문화를 젊은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인생 후반부의 중요한 역할이란 이야기입니다.

03 세대 간 다리가 된 ‘당신의 역사’

강남통신이 연재한 ‘당신의 역사’를 보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던 과거, 오로지 끼니를 해결하는 게 과제였던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습니다. 그런 걸 보면 풍족한 삶을 살아가는 요즘 젊은이들의 하소연이 배부른 투정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도 사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미움 받을 용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라 하죠. 이 제목에 젊은이들의 손이 간다는 것이 슬프게 여겨집니다.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다 지쳐 이런 이상한 용기까지 필요한 게 된 거죠. 경쟁 사회의 순위 매김과 비교에 어른이 되기도 전에 지쳐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생 50년 이상 사신 분이라면 이 책에 손이 가는 게 좋은 일입니다. 살아 보니 남의 시선이 아닌 나의 가치, 나의 역사가 중요한 것을 깨달은 것이니깐요. 그러나 도전하기도 전에 힐링에 몰입하는 것은 회피일 수 있습니다. 『행복한 나라의 행복한 젊은이』란 일본 사회학자가 쓴 책을 보면 일본의 사회경제 상황은 좋지 않은데 20대의 행복지수가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더 행복해저서라기보다는 미래가 암울하기에 ‘인생 뭐 있어, 오늘 그냥 즐겁게 살자’란 철학을 조기에 자기 삶의 소프트웨어에 넣어 버린 것 같다는 저자의 주장이 흥미로웠습니다. 발전과 혁신이 짜증 나고 지치게 하는 단어이긴 하지만 젊은이들이 도전의식을 버리고 조기에 다 도인이 되어 버리면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일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인생 후배들의 패기와 좀 더 인생을 산 선배들의 지혜가 만나야 사회는 좋은 쪽으로 움직입니다.

얼마 전 30대 직장인이 20대 후배 신입직원들에 대해 ‘너무 소극적이고 무기력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제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너나 잘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습니다. 갈등을 일으키는 세대 간의 나이 차이도 줄어들고 있나 봅니다. 그만큼 변화가 빠른 세상이라는 거겠죠. 세대 간 불통이 사회의 갈등 요인으로 커지고 있습니다.

세대 차이에 따른 불통은 당연한 것입니다. 다른 세대를 살았으니깐요. 서로 나를 이해해달라 요구해도 잘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다르니까요. 서로의 입장을 들이대서는 갈등의 해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대 간 갈등을 극복하고 통합을 이루는 것이 윤리나 사회통합, 미래가치창조 측면에서 의미 있다고 논리적으로 접근해도 잘되지 않습니다. 소통이란 논리 이전에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5월에 폴 매카트니 내한공연을 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42년생이시니 73세 어르신인 셈입니다. 그분의 성공이 부러웠지만 그분이 안 늙은 건 아니죠. 그런데 그 어르신의 노래에 너무나 넓은 세대의 사람들이 마음을 합치고 공감하는 것을 보고서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머리가 하얀 어르신과 초등학교 여학생이 함께 ‘헤이 주드’(hey Jude)를 떼창합니다. 세대 간 경계가 잠시 무너진 광경이었습니다. 같은 문화 콘텐트를 공유하면서 세대 간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죠.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문화 몰입과 어르신들의 심도 깊은 문화계승의 욕구가 문화체험이라는 따뜻한 용광로에서 만나면 세대 차이가 녹아 들어가고 소통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역사’ 안에는 한 사람의 문화가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람의 단순한 지위와 역할이 아닌 그 사람의 삶의 내용과 만날 수 있어 시대를 넘어선 소통이 쉽게 일어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에게 젊은이는 배터리, 에너지원입니다. 젊은이들이 나를 따뜻하게 바라봐 줄 때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에너지가 충전됩니다. 긍정적인 에너지가 충전될 때 ‘잘 살았다’라는 과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일어나면서 오늘과 미래가 행복해집니다. 젊은이들에게 어르신들은 삶의 지혜입니다. 누구나 아는 이야기이죠. 그러나 그 지혜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면 잔소리가 돼 버립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도 잔소리가 되는 순간 다 튕겨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인생 선배들의 지혜를 이야기로 만들고 역사로 만들어 문화 콘텐트로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화 콘텐트 안의 지혜는 나를 비난하는 잔소리 아닌 감동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젊은이들이 나의 역사에 감동할 때 어르신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충전됩니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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