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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을, 황순원이 그립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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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4호 30면

일제로부터의 해방과 나라의 분단은 동시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곧 바로 삼팔선이 막혔다. 안개 낀 임진강을 건너 월남하는 사람들은 감시병의 눈을 속여야 했다. 발각되면 생명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 배를 빌려 도강하는 중에 긴장된 배 안에서 별안간 갓난애의 울음소리가 솟았다. 모두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가운데 그 소리가 사라졌다. 애 어머니가 갓난애를 배 밖으로 내던져 버린 것이다. 일행은 무사히 강을 건넜다. 그런데 그 어머니는 제 손으로 퉁퉁 불은 양쪽 젖꼭지를 가위로 잘라버렸다.


소설가 황순원이 1965년에 쓴 단편 『어머니가 있는 유월의 대화』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불러오게 한다. 엄중하기 이를 데 없는 공중(公衆)에 대한 책임과 혈육을 버린 처절한 참회 사이에서, 그 어머니가 선택한 것은 극단적인 자기 징벌이었다. 매우 절제되고 상징적인 방식으로, 작가는 ‘어머니’란 이름의 인간을 조명했다. 문학에 있어서 ‘인간’은 어쩌면 가장 오래고 또 오래 이어질 숙제다. 황순원 소설은 시종일관 이 인간애와 인간중심주의를 붙들고 있었다.


6·25동란의 휴전협정이 조인된 것은 1953년 7월이다. 그런데 황순원은 전란의 포성이 요란하던 그 해 4월, 맑고 순수하기 비길 데 없는 단편 『소나기』와 『학』을 발표했다. 『학』은 전쟁 시기에 적이 되어 만난 두 친구의 우정과 동심을 다룬 것이니 그래도 당대의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다. 그러나 『소나기』는 차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 조심스러운, 소년과 소녀의 미묘하고 아름다운 감정적 교류를 그렸다. 어떻게 그처럼 삶의 형편이 곤궁하고 혹독하던 시절에, 그처럼 순정한 감성을 담은 소설을 쓸 수 있었을까.


작가와 그의 문학세계, 그리고 수발(秀拔)한 작품 『소나기』를 형상화 한 문학 테마파크가 경기도 양평에 있다. 국내에서 가장 많은 유료 입장객이 찾아가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마을이 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이 고장의 한 산허리에 3층 건물 800평의 문학관이 서 있고, 1만4000평의 야산에 문학공원과 산책로가 조성되었다. 아직 잔서(殘暑)가 남아 햇볕이 따가운 초가을 한 나절을 이 마을에 머물다 보면, 작가가 남긴 문학의 향훈과 그를 기리는 추모의 뜻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현장임을 알게 된다. 이 시너지 효과의 바탕에는 20세기 격동기의 한국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極)을 이룬, 작가에 대한 미더움이 깔려 있다.


소나기마을 관람자들이 아무 이유 없이 늘어날 리 없다. 작가와 작품의 명성 외에도 수도권 근접성이라는 요인이 있지만, 더 중요하게는 전시자의 관점이 아니라 방문자의 눈높이에 맞춘 콘텐트 때문으로 보인다. 작가와 작품의 공간을 유기적으로 매설하고 조형과 영상을 활용해 입체적인 전시실을 구성하는 한편, 동반한 어른과 아이들이 작품의 내면을 함께 체험할 수 있는 여러 구조가 있다. 애니메이션 영상실, 북 카페, 인공 소나기도 그렇고 동화구연이나 손편지쓰기 교실도 인기 높은 프로그램이다. 이 모든 시설과 콘텐트 확보에는 지자체의 선진적 인식을 실천한 양평군의 공이 크다.


올해로 황순원 선생 탄생 100주년이다. 소나기마을에서는 이를 기념해 첫사랑 콘서트, 『소나기』속편 쓰기를 비롯한 여러 행사를 진행했다. 마침 내일(14일)이 선생의 타계 꼭 15년이 되는 기일이다. 오늘까지 사흘 간 황순원문학제가 열려, 소나기마을은 전국에서 몰려온 인파로 붐빈다. 문학관 바로 곁에 영면하고 있는 선생은 이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소 외형의 치장과 번잡을 싫어했던 성품이나, 완연한 가을 풍광 속에 맑은 마음으로 모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인본주의를 글쓰기의 척도로 삼았던 자신의 선택을 다시 수긍하지 않았을까.


김종회문학평론가·경희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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