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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문화유산국민신탁·카툰캠퍼스가 함께하는 역사통(通) 기자단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광화문 앞에서 역사통(通) 기자단이 문화유산국민신탁 김진형 연구원(오른쪽)의 설명을 듣고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일을 연출해 촬영을 하고 있다.

역사로 통하는 ‘역사통(通) 기자단’ 1기가 분당 장안초에서 결성됐습니다. 1기는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여 나라가 위태로웠던 1895~1910년 사이를 살펴봅니다. 지난 5일 경복궁에서 첫 답사가 열렸습니다.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일어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중심으로 둘러봤습니다.

근정전
근정전 내부

1코스
광화문 → 사정전
| 답사는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으로 들어선 흥선대원군의 가마를 따라가는 여정으로 시작했다. 새벽 5시 광화문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궁궐수비대 홍계훈 대장이 궁궐로 들어오는 흥선대원군의 가마를 저지하려 하자 일본인 낭인패(일정한 직업 없이 떠돌아 다니는 무리)가 나타나 홍 대장을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훗날,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취재했던 영국 기자는 홍 대장의 몸에서 12발의 총알이 발견됐다고 말했다.

임오군란 당시의 훈련원
흥례문

그와 명성황후의 인연은 임오군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오군란은 1882년 구식군대가 신식군대인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를 받는 것에 항의해 일어났다. 당시 구식군대는 명성황후를 잡기 위해 창덕궁까지 난입했는데 이때, 명성황후를 누이로 속여 구한 인물이 홍 대장이었다. 그는 이후 고속 승진을 하면서 궁궐수비대 대장까지 맡게 되었다.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의 가마를 방패 삼아 광화문을 넘어선 일본 낭인패들은 ‘왕의 공간이 시작되니 마음가짐을 단정히 하라’는 의미가 담긴 영제교를 지나자마자 서쪽으로 황급히 사라졌다. 흥선대원군의 가마는 홀로 흥례문을 지나 근정문 앞에 멈췄다. 근정전 앞에는 근정전을 받치고 있는 월대부터 근정문까지 정1품부터 종 9품까지의 품계석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근정전은 왕의 즉위식처럼 국가의 중대한 행사가 열리는 정전으로 경복궁의 심장과 같은 곳이다. 1392년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경복궁을 창건하면서 지은 건물로 1592년 임진왜란으로 불타 사라진 것을 1867년 흥선대원군이 다시 지었다. 현존하는 국내 최대의 목조건물로 국보 제223호다. 거침없던 흥선대원군의 가마는 오늘날 국무회의에 해당되는 어전 회의가 열리는 사정전 월대 앞에 멈췄다. 가마에서 내린 흥선대원군은 사정전에 앉아 날이 밝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김수아 역사통 기자단 1기

1코스 소감 김수아 역사통 기자단 1기 | “광화문을 가까이에서 보면 무척 웅장하고 멋있어요. 광화문의 원래 이름은 사정문이었는데, 집현전 학자들이 광화문으로 하자고 건의해 바꿨다고 해요. 경복궁의 심장 같은 근정전을 가기 위해서는 광화문·흥례문·근정문 3가지 문을 지나야 해요. 황제 국가인 중국은 5개의 문을 지난다고 해요. 근정문을 지나면 근정전이 있는데, 바닥이 울퉁불퉁한 박석으로 깔려 있어요. 이유는 ‘왕이 있는 곳에서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이며 다니라’는 뜻이래요.”

강녕전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

2코스
강녕전 → 자경전
| 경복궁은 왕과 신하들이 정치하는 외전(外殿)과 왕실 가족이 생활하는 내전(內殿)으로 나뉘는데 왕의 침소인 강녕전은 내전이 시작되는 곳이다. 다른 건물과 달리 용마루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용(왕)이 기거하는 곳이기에 용마루를 놓을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다. 강녕전을 지나면 교태전이 나온다. 양과 음이 교류한다는 뜻을 담은 왕비의 침소다. 역시 용마루가 없다.

자경전 꽃담을 둘러보고 있는 역사통 기자단.

교태전을 지나면 아름다운 꽃담으로 둘러싸인 자경전이 눈에 띈다. 고종의 할머니인 신정왕후의 처소로 현재 경복궁에서 옛 모습을 간직한 유일한 건물이다. 신정왕후는 1819년 조선의 23대 왕인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와 혼례를 올려 세자빈이 되지만, 효명세자가 4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 왕비가 되진 못했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고 신정왕후의 아들 헌종이 24대 왕위에 올라 비로소 왕대비(선왕의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시어머니 순원왕후의 기세를 이기지는 못했다. 순원왕후는 당시 막강했던 안동김씨의 세력에 힘입어 후사 없이 떠난 헌종의 후계로 평민처럼 살던 철종을 세웠다. 신정왕후가 실권을 잡은 건 1863년 철종 또한 후사 없이 승하하고 1867년 순원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부터다.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된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과 손잡고 흥선대원군의 둘째아들을 왕으로 추대한다. 그가 바로 조선의 26대 왕 고종이다.

자경전

고종은 신정왕후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교태전 동쪽에 처소를 마련하고 자경전이라 이름 지었다. 자경전은 창덕궁에도 있는데,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지은 처소가 그것이다. 효심이 강했던 정조는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과 마주볼 수 있도록 궁의 가장 높은 곳에 자경전을 세웠다.

이다효 역사통 기자단 1기

2코스 소감 이다효 역사통 기자단 1기 | “강녕전은 왕의 처소여서 그런지 겉모습도 멋있어 보였어요. 나도 이런 곳에서 살면 어떨까 생각을 했는데, 탐내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루하루가 불안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강녕전 옆에는 교태전이 있어요. 교태전 뒤쪽에는 ‘아미산 정원’이라 불리는 돌 계단 형식의 정원이 있어요. 주변 자연과 어우러지는 멋진 곳이죠. 정원에는 여러 문양이 새겨진 화려한 굴뚝이 있어요. 보물로 지정됐을 정도로 아름다우니 꼭 들러 보세요.”

건청궁

3코스
건청궁 → 향원정
| 영제교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튼 일본인들은 경회루을 지나 경복궁 가장 북쪽에 있는 건청궁으로 향했다. 건청궁은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이 돼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섭정(왕을 대리해 통치함) 아래 있었던 고종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1873년 사비로 몰래 짓기 시작한 왕과 왕비의 처소였다. 경복궁 전각 중에서 유일하게 궁이라는 이름을 붙여 ‘궁 안의 궁’이라고도 불렸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맞서 개방정책을 펼쳤던 명성황후의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향원정

순식간에 건청궁에 들이닥친 낭인패들은 명성황후를 찾기 시작했다. 장안당에 있던 고종은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불러 곤녕합에 있었던 명성황후를 보호하게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본 낭인패들은 왕비의 침소를 막아선 이경직의 두 팔을 베고 명성황후를 찾아 무참히 살해했다. 그리고 시신을 건청궁 동쪽에 위치한 녹산으로 옮겨 불태우고 남은 시신을 인근 연못인 향원정에 버린다. 한 나라의 국모를 그것도 누구나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궁궐에서 살해하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역사통 기자단이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살해되던 날을 재연하고 있다.

일본은 이 시건을 임오군란 때처럼 명성황후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흥선대원군의 소행으로 몰아가려 했다. 하지만, 사건을 목격한 미국인 다이 장군과 러시아인 사바틴이 전 세계 언론에 폭로하면서 일본의 만행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진다.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게 된 일본은 주한 일본공사였던 미우라 고로가 개인적으로 벌인 일이라고 주장하고 그를 본국에 소환해 재판을 받게 했다. 하지만 미우라 고로 일당은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는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은 ‘을미년에 일어난 변(갑자기 생긴 재앙)’이라고 해서 을미사변이라고도 불린다. 이후, 신변에 두려움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한다.

박보경 역사통 기자단 1기

3코스 소감 박보경 역사통 기자단 1기 | “당시 일본은 조선을 차지하는데, 일본을 밀어내고 러시아·미국·영국 등 서구 열강과 친하게 지내는 명성황후가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본은 ‘여우사냥’이라는 작전을 세우고 건청궁에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한 것이죠. 건청궁은 한 나라의 국모가 어이없게 살해당하는 슬픔이 가득한 곳이에요. 또,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기시설이 들어온 궁이기도 해요. 에디슨 전기회사에서 시공을 했다고 하네요.”

역사통(通) 기자단의 생각이 커지는 워크북

‘생각이 커지는 워크북’은 역사 현장을 직접 찾아가 취재하고 그 내용을 한 번 더 생각해 볼 수 있는 코너입니다.

사진 보고 스토리 만들기

첫 번째 사진은 1990년대 경복궁 사진입니다. 광화문 너머 조선총독부 청사가 보이네요. 두 번째 사진은 지금의 경복궁 사진입니다. 조선총독부 청사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는 왜 사라졌을까요?

답사퀴즈

답사까지 다녀왔는데, 학교에서 시험 보면 답이 가물가물하다고요? 인간의 뇌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 마련이죠.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답사 퀴즈! 영 모르겠다면 답사 기사를 슬쩍 살펴보세요. 힌트가 숨어 있습니다.

1 조선의 개국 공신인 정도전은 경복궁 전각과 건물들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광화문은 정도전이 지은 이름이 아닙니다. 세종 7년인 1425년 집현전 학사들의 건의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광화문의 본래 이름은 무엇일까요. ( )

2 이 사람은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세도정치가인 안동 김씨에게 “세상에 참 구차한 왕족도 있다”고 비웃음을 당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둘째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전세가 역전됐지요. 왕권 강화를 위해 서원을 철폐하고 폐허였던 경복궁을 다시 짓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 )

3 1905년 을사조약을 발판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장악하고 1910년에는 이 건물을 짓습니다. 이 건물은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에 만들어져 일제강점기 우리 문화 수탈의 핵심 장소로 사용됐습니다. 이 건물은 무엇일까요. ( )

4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근정전까지 오려면 총 3개의 문을 지납니다. 어떤 문을 지나는지 차례대로 말해보세요.

( ) - ( ) - ( )

5 이 여인은 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의 후손으로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간택돼 고종과 결혼합니다. 쇄국정책을 주장했던 흥선대원군에 반하여 개방정책을 추진한 이 여인은 누구일까요. ( )

6 조선정부가 러시아와 친해지려 하자, 일본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주축으로 새벽 경복궁에 들어와 명성황후를 시해합니다. 이 사건을 무슨 사건이라고 부르나요. ( )

답사퀴즈 정답 | 1 사정문 2 흥선대원군 3 조선총독부 4 광화문·흥례문·근정문 5 명성황후 6 을미사변

글=황정옥 기자 ok76@joongang.co.kr 사진=우상조 기자 woo.sangjo@joongang.co.kr·중앙포토, 진행=황정옥·이민정 기자, 권소진 인턴기자, 문화유산국민신탁=김진형 연구원, 대학생 멘토=강철웅(한국전통문화대 4)·오나영(이화여대 1)·이민희(경인교대 1)·이수인(경희대 4)

미션! 경복궁에 숨겨진 보물을 찾아라

경복궁은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수도를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지은 첫 번째 법궁(法宮·왕이 사는 궁)입니다. 조선왕조의 상징적인 궁이자, 500년 역사가 켜켜이 쌓인 곳이죠. 오랜 역사만큼 경복궁에는 구석구석 시대를 아우르는 보물들이 많습니다. 어떤 보물들이 숨겨져 있는지 역사통 기자단 1기들이 찾아 나섰습니다.

보물 1761호 향원정 향원정은 고종이 건청궁 앞에 연못을 파고 가운데 섬을 만들어 세운 2층 정자야. 왕과 그 가족들이 휴식을 취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지만 비운의 역사도 담고 있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기록한 일본 보고서에 따르면 명성황후 시신을 불태우고 남은 시신을 가까운 연못에 버렸다고 적혀 있는데, 그 연못을 향원정이라고 추측하고 있거든.

보물 811호 아미산 굴뚝 아미산 굴뚝은 교태전의 굴뚝으로 1865년 경복궁을 중건할 때 만들었어. 아미산 굴뚝은 4개가 서 있는데 육각형의 굴뚝 벽에는 학·박쥐·봉황·나티·소나무·매화·대나무·국화·불로초·바위·새·사슴·나비·해태·불가사리 등의 장수와 부귀를 기원하고 화마와 악귀를 막는 의미가 담긴 문양들이 가득해. 후원의 장식적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어.

보물 1760호 수정전 수정전은 근정전 서쪽에 있는 건물로 세종 때 학문을 연구하고 왕에게 주요 정책을 자문하고 건의하던 기관인 집현전이 있던 위치야. 이 건물도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는데 고종이 재건하면서 ‘정사를 잘 수행함’이란 의미로 수정전이라고 이름 지었어. 수정전은 근정전 서편의 궐내각사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건물이야. 전반적으로 중건 당시의 모습이 잘 유지되어 있지.

보물 845호 앙부일구 1434년 세종 때 장영실이 만든 앙부일구는 한국 최초의 공중시계야. 반구형의 대접에 네 발이 달린 모양으로, 13개 계절선과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절기가 표기되어 있어. 수직으로 7개의 시각선도 있는데, 시간을 알 수 있는 선이야. 동쪽에서 뜬 해가 서쪽으로 질 때 생기는 그림자가 시각선에 비치면서 시간을 알 수 있었던 거지.

보물 812호 근정문 및 행각 근정문은 광화문과 흥례문을 지나면 나오는 경복궁의 세 번째 문으로 근정전의 정문이야. 근정전과 마찬가지로 왕위 즉위식 등 중요한 행사가 치러졌지. 행각은 근정전의 주변 공간을 직사각형으로 둘러 감싸고 있는 구조물인데, 조선시대 법궁의 위엄에 맞게 조성되어 있어.

보물 847호 풍기대 풍기대는 깃발을 꽂아 바람의 세기와 방향을 재는데 사용했던 시설로 전체 높이가 224.3㎝나 돼. 아래에는 화강암을 다듬어 조각한 대를 놓고, 그 위에 구름무늬를 새긴 팔각 기둥을 세운 모습이야. 기둥 꼭대기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기둥 옆으로 물이 고이지 않게 배수용 구멍을 뚫었어. 깃대 끝에 긴 깃발을 매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과 바람의 세기를 파악했던 거지.

보물 1759호 사정전 사정전은 왕이 거처하며 정사를 보살피던 곳으로 근정전 뒤편으로 사정문을 지나 정면에 위치해 있어. ‘생각하고 정치하라’는 뜻으로 정도전이 지었어. 사정전은 원래 왕과 신하가 공부를 하고 정사를 돌보던 곳인데, 세종 때에는 왕의 주최로 공을 치는 놀이인 타구 대회가 자주 열리기도 했대.

정리=권소진 인턴기자, 글=박서영·박성현·봉재훈·서윤선·이지원·하나유론슨·황성웅(분당 장안초) 역사통 기자단 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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