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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한 미각 되찾기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443호 22면


“얼큰한 국물을 좋아하는 것은 타고 난 듯해요.”


국물 음식을 줄이라고 했더니 환자는 집안이 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맛에 대한 선호는 타고나는 것일까? 유전적인 소인도 있다. 하지만 후천적인 경험 역시 큰 부분을 차지한다.


미각을 포함한 각종 감각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형성된다. 뱃속에 있는 아기도 엄마가 먹는 음식에 따라 다른 표정으로 반응한다고 할 정도다. 특정 음식에 대한 선호는 일생을 통해 결정되지만, 미각 형성에 가장 중요한 시기는 태어나서부터 이유기를 거치는 학령전기다. 이유식을 시작하는 생후 5~6개월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경험하고 각 식재료가 가진 향·질감·맛 등에 노출되는 중요한 때이다. 어린 시기부터 짜거나 단맛이 강한 음식에 자주 노출이 된다면, 덜 자극적인 음식은 맛이 없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지자체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시행하는 미각형성 교육은 아이들의 건강한 입맛을 형성하는 환영할 만한 프로그램이다.


인류가 살아오는 과정에서 단맛은 우리 몸에 영양소를 공급해주는 음식을, 쓰거나 신맛은 변질되었거나 독성 있는 음식을 감별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 우리 미각을 사로잡은 많은 음식은 자극적이다. 식재료 고유의 맛을 느낄 수 없게 미각을 마비시킬 정도다. 최근 소위 쿡방 프로그램 중 일부에서는 맛을 내는 특급 비법으로 설탕이 소개되기도 한다.


특히 한국음식은 양념과 간이 맛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맛이라는 것은 설탕·간장·고춧가루·참기름 등을 얼마나 적절히 버무리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불고기·갈비찜·찜닭 등 달짝지근한 음식에는 설탕과 간장이 단골 양념이다. 요리를 잘 하는 주부가 있는 집에는 비만한 가족구성원이 많아질 수도 있다. 맛있어서 많이 먹다 보니 그럴 수도 있지만, 갖은 양념으로 인해 불필요한 열량을 섭취하는 것, 그로 인해 맛이 강한 음식을 계속 찾게 하는 것 등이 원인이 될 수 있다.


양념고기 보다는 생고기를 구워먹을 때 고기의 원래 질감과 맛을 느낄 수 있다. 채소도 갖은 양념으로 무치기보다는 생으로 먹으면 간장·설탕 맛에 묻혀 있던 고유의 향과 맛을 느낄 수 있다. 가능하면 식재료가 가진 고유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는 방법으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 강한 맛에 찌든 우리의 미각을 다시 살리는 데 도움이 된다.


“맛있는 것은 다 못 먹게 하고, 뭘 먹고 살라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하는 환자들이 있다. 이 경우는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의 종류를 바꾸도록 노력하라고 조언한다. 덜 달고, 덜 짜고, 덜 기름진, 좀 심심한 음식을 좋아하는 음식으로 몸이 받아들이게 나를 훈련시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 것이 익숙해지면 양념을 덜 한 음식에서도 짠맛·단맛 등 여러 맛을 충분히 음미할 수 있게 된다.


아이들이 어릴 때 음식을 먹고 나면 계속 맵다고 했다. 나중에서야 단맛·짠맛·신맛·쓴맛 모두를 맵다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자라면서 어휘가 풍성해지자 아이들도 다양한 맛 표현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양한 표현을 사용해 다양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런데 자극적인 맛에 익숙해져 오히려 입맛이 단순해져서야 되겠는가. 오늘부터라도 우리의 잠자는 미각을 일깨워보자.


박경희?한림대 성심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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