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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연대의식

중앙선데이

입력

VIP 독자 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남윤호입니다. ‘땅콩 회항’ 사건 결심 공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이 법정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봉건시대 노예처럼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당했다. 일할 권리와 자존감은 치욕스럽게 짓밟혔다.” 이 보도를 접하고 많은 분들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하는, 논쟁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기업은 과연 누구의 것입니까. 단순한 주권(株券)을 넘어 기업의 주권(主權)은 누구에게 있습니까. 이게 정답이다, 하며 대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 역시 이 질문에 답할 능력이 없습니다. 다만 '땅콩 회항' 사건을 보면 종업원의 주권의식이 커진 건 분명합니다. 일회용 부속처럼 여겨지던 미생(未生)들의 반란이자 '인간선언'이라고나 할까요. 기업은 자본과 노동의 협동으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직원 역시 일정한 지분을 지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지분이라는 표현을 꼭 주식 소유에 입각한 주주권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기업에 대한 발언권, 또는 정당한 위상쯤으로 보면 되지 않나 싶습니다. 직원들의 위상에 대해선 서양보다 동양 학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곤 합니다. 가고노 다다오(加護野忠男)라는 일본의 경영학자는 연공서열과 장기고용을 전제로 종업원의 '보이지 않는 출자'라는 개념을 주장합니다. 어리버리한 입사 초년병 시절을 제외하면 왕성하게 일하는 30~40대에선 대개 임금보다 높은 생산성을 냅니다. 그 초과 생산성이 기업의 잉여인데, 종업원 입장에선 이게 회사에 대한 출자나 같다는 겁니다. 그리고 나이 들어 정년이 다가올수록 생산성이 떨어지는데도 높은 임금을 받음으로써 출자분의 일부를 회수한다고 합니다. 가고노 교수는 도요타나 닛산 같은 일본 대기업을 대상으로 수 십년에 걸친 직원들의 '보이지 않는 출자' 규모를 계산하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보이지 않는 출자'에 해당하는 발언권이랄까, 권리라는 게 있으니 기업이 직원들을 좀더 적극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보이지 않는 출자'는 직원들의 행동에도 여러 영향을 준다고 합니다. 시니어가 됐을 때 출자분을 되도록 많이 회수하려면 무엇보다 회사가 잘 돼야 합니다. 따라서 자발적 충성심에 대한 강한 인센티브가 주어진다고 합니다. 동시에 높은 자리로 승진할수록 출자분의 회수율이 높아지므로 사내에선 치열한 경쟁이 촉진됩니다. 합리적인 충성과 적당한 경쟁은 조직 발전에 플러스가 되는 법이지요. 그런 조직에서 종업원이란 대한항공 박 사무장의 말처럼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당하는 노예 같은 존재가 결코 아닙니다. 이는 일본 학자들의 갈라파고스적 이론이 아닙니다. 막연한 예정조화론도 아닙니다. 일본의 고용관행을 가리키는 종신고용이란 말 많이 들어보셨지요. 미국의 경영학자 제임스 아베글렌이 1958년 『Japanese Factory』라는 책에서 'lifelong commitment'라고 썼는데, 이를 번역자가 '종신고용'으로 옮기면서부터 공식용어로 굳어진 것입니다. 원래 아베글렌이 강조하려던 것은 단순한 장기고용이 아니었습니다. 회사와 직원 사이에 평생 이어지는 유대감이자 연대의식이었습니다. 그 연대의식이 강했다면 '땅콩 회항'도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주주와 기업 사이의 연대의식은 그 기업의 경쟁력으로도 연결된다고 합니다. 영국의 경제학자 존 케이는 영국 주식시장의 문제점을 분석해달라는 정부의 연구용역을 받고 2012년 '케이 리뷰'를 내놨습니다. 여기에서 그가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한 것이 투자자(주주)의 단기 성과주의였습니다. 보고서 원문엔 'short-termism'으로 돼 있더군요. 눈앞의 이익을 좇는 단타매매가 성행하다 보니 기업 경영이야 어찌 되든 개의치 않는 분위기가 확산됐고, 이게 기업 경쟁력에까지 지장을 준다는 분석이었습니다. 워런 버핏처럼 기업의 성장 잠재력을 바탕으로 한 장기적 관점의 투자가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기업과의 연대의식을 지닌 투자자(주주)들이 필요하다는 뜻이었지요. 마침 국내에서 그런 실험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3년 전 기업의 주가 상승으로 큰 돈을 번 개인 주주가 이익환원 차원에서 직원들에게 주식을 증여한 사례가 있었습니다. 슈퍼 개미 한세희씨와 쌍용머티리얼 얘기입니다. 물론 이 에피소드가 '경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한 한 컷의 예외적인 미담에 그칠지, 주주와 직원 사이의 연대로 이어지는 계기가 될지는 불분명합니다. 금주 중앙SUNDAY는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들 사이의 협동과 연대의 가능성을 타진해봅니다. 지난주 중앙SUNDAY는 20%대로 주저앉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을 분석했습니다. '뭘 해도 된다는 자만심'이 세월호 참사 때도 떨어지지 않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을 끌어내렸다고 진단했습니다. 지지율 하락이 심상치 않았던지 청와대는 소통을 강화한다고 나섰습니다. 특보단을 구성한 데 이어 내각과의 정책조율을 강화하기 위한 기구도 설치한다고 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소통을, 뒤늦게 강화하겠다며 새로운 조직과 기구를 만드는 모습입니다. 섣부른 평가는 피하겠습니다.실질적인 성과를 기대합니다. [관련기사] 朴 대통령 지지율 20%대 급락“뭘 해도 된다는 자만심이 독” [관련기사] “국민을 이기물라 카는데 … 지금 선거하문 박살 날끼다”박 대통령 정치적 본향 TK 가보니 중앙SUNDAY의 연중기획 '작은 외침 LOUD'가 생활의 현장에서 조금씩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몇몇 구청은 버스 정류장에 괄호 표시의 안내선을 긋기도 하고, 아이들의 통학로 건널목에 길 양옆을 살피라는 눈동자를 그려 넣었습니다. 이어 유명 커피 체인들이 커피 '나오시는' 걸 피하기 위해 종이컵에 제대로 된 용법을 표기하기로 했습니다. 이처럼 실질적인 변화를 불러올 독자 여러분의 작은 아이디어들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관련기사] 커피는 ‘나오시는’ 게 아니고, 눈은 ‘예쁘신’ 게 맞습니다 [작은 외침 LOUD] ⑤ 사물 존칭은 이제 그만 [관련기사] 사람이 뒷전인 사물 존칭, 가식적 친절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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