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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생명예찬’⑨] 행복 추구의 진화론적 전략

온라인 중앙일보

입력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는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이타적 행위… 소박하게 살면서 자식을 낳아 잘 기르는 삶 속에 존재의 진리 깃들어

행복을 궁극의 목표로 삼으면, 사람은 궁극적으로 불행해진다. 짙은 쾌락을 맛보지만 공허감이 따른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 삶의 진정한 목표의 성취에 실패한다. 행복을 찾는 길은 역설적으로 행복을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는 데에 있다.

유기체는 생존과 생식에 도움이 되는 욕망을 지녀야 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애써야 한다. 그런 욕망이 충족된 상태를 우리는 행복이라 느낀다.

초등학교 하교 시간엔 세상이 갑자기 환해진다. 교실에서 풀려난 아이들이 재잘거리고 춤추면서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보다 흐뭇한 풍경은 드물다. 파릇한 싹들이 활기차게 자라나는 것이다. 어지간한 것으로는 녀석들의 몸을 가득 채운 삶의 기운을 누를 수 없다. 녀석들에게 세상은 그저 좋은 곳이다. 무엇보다도, 세상의 맛이, 냄새와 빛깔과 신비로움이 어른들에게보다 훨씬 짙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해는 봄이고,

날은 아침이다;

아침은 일곱 시고;

산비탈은 이슬 진주로 덮였다;

종달새는 날개를 펴고;

달팽이는 가시나무에 앉았다;

신은 하늘에 있고;

이 세상 모든 것이 잘 돌아간다.

The year’s at the spring,

And day’s at the morn;

Morning’s at seven;

The hillside’s dew-pearled;

The lark’s on the wing;

The snail’s on the thorn;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녀석들은 모두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파의 노래(pippa’s song)>를 부르는 셈이다. 행복이란 말을 입에 올릴 나이는 아니지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어쩌면 녀석들은 행복이란 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행복한지도 모른다. 존 스튜어트 밀의 말대로, “당신 자신에게 행복한가 물어보는 순간, 당신은 행복하기를 멈춘다.” 그래서 나는 가볍게 녀석들을 축복해준다. “부디 행복이란 말을 드물게 떠올리기를.”

행복은 최적화가 애초에 불가능한 특질

시기심은 소박한 공동체 안에서도 거의 어김없이 발동한다. 그것은 진화의 산물이면서 분발심을 가능케 하는 심리적 에너지다.

요즈음 행복이란 말이 부쩍 자주 들린다. 살기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것일까? 행복은 물론 옛적부터 삶의 목표로 꼽혔다. 제러미 벤담의 “가장 많은 사람의 가장 큰 행복은 도덕과 입법의 바탕이다”라는 말은 자주 인용된다. 1776년에 나온 미국 독립선언서는 ‘행복의 추구’를 ‘양도할 수 없는 권리’ 가운데 하나로 규정했다.

그러나 막상 행복에 대해 생각해보면, 그것의 실체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자신이 행복한지 불행한지 판별하기는 쉽지만 왜 행복한지, 무엇이 행복을 구성하는 요소인지, 얼마나 행복한지, 뚜렷이 알기 어렵다. 심리 상태는 원래 이해하거나 측정하기 어렵다. 행복이 삶의 궁극적 목표라면, 어째서 행복이 그렇게 모호한 것일까? 이것은 보기보다는 진지하고 중요한 물음이다.

우주는 모호한 원리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졌을리 없다. 우리가 아는 한, 우주는 더할 나위 없이 논리적으로 구성되고 움직인다. 논리적이 아닌 것은 이 우주에 존재할 수 없다. 존재할 자격이 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이 논리적으로 움직이면, 그것은 최적의 상태를 지향할 것이다. 찬찬히 들여다보면, 실제로 거의 모든 것이 어떤 특질을 최적화한다.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복지를 최적화하는 행태다. 기업이 이윤을 최적화하는 것도 익숙한 예다. 예컨대 법칙의 작용이 가장 뚜렷한 물리적 수준에서 이런 사정이 두드러진다. 빛은 시간을 최적화한다. 그래서 빛은 두 지점 사이를 움직일 때 걸리는 시간을 최소화한다. 밀도가 다른 유체를 지날 때 빛이 굴절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광학의 기본 법칙인 ‘페르마(Fermat)의 최소시간의 법칙’으로 설명되었고 궁극적으로 ‘변분 원리(Variational Principles)’라는 모습으로 일반화되었다.

자연이 어떤 특질을 최적화하려면, 그 특질을 잴 수 있어야 한다. 잴 수 없는 것들은 최적화할 길이 없다. 따라서 잴 수 없는 특질은 근본적이라고 볼 수 없다. 행복은 정의하기도 어렵고 측정하기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고 측정에 들어갈 요소를 고르는 데도 사람마다 다를 터이다. 즉 최적화가 애초에 불가능한 특질이다. 그런 특질이 삶의 궁극적 원리나 목표가 되기는 어렵다.

행복의 본질을 깊이 알려면, 삶의 궁극적 목표와 행복 사이의 관계에 대해 살펴야 한다. 모든 생명체의 목표는 영생이다. 그래서 자식을 낳아 자기 목숨을 끝없이 유지하려 애쓴다. 보다 근본적 수준에선 자기 유전자를 되도록 많이 퍼뜨리려 애쓴다.

자식을 통해 영생하려면, 유기체는 생존과 생식에 도움이 되는 욕망을 지녀야 하고 그것을 충족시키려 애써야 한다. 그런 욕망이 충족된 상태는 우리가 행복이라 느끼는 상태다. 건강하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오르고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이성에게 매력적이고 마음에 드는 이성을 배우자로 맞아 뛰어난 자식을 낳아서 잘 기르면, 우리는 행복하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생존과 생식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이루게 된다. 즉 행복은 궁극적 목표를 알려주는 깃발과 같다. 그 깃발을 따라 올라가면, 우리는 생존과 생식이라는 우리의 목표를 이루게 된다.

‘자식농사’는 왜 부모 행복의 원천인가?

걱정스럽게도, 사람의 경우, 이처럼 멋진 구도가 점점 비효과적이 되어간다. 유기체의 생존과 생식을 돕는 행복이 스스로 목표가 되어가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본 단위는 유전자이고, 유기체는 유전자가 자신의 생존과 생식을 돕는 도구로 만들어낸 존재다. 그래서 모든 유기체는 유전자를 한껏 퍼뜨리려 애쓴다. 자식을 되도록 많이 낳아서 키우려는 노력은 바로 그런 목적에 봉사한다. 동물이 뇌를 갖추어 지능을 지니게 되자, 유기체의 행동 영역은 갑자기 넓어졌다. 유기체는 이전처럼 늘 유전자의 지시에 따라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많은 일에서 스스로 판단하게 되었다. 유기체에 대한 유전자의 지배가 간접적이 된 것이다.

지능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은 늘 자신을 예민하게 의식하고 자신을 위하게 되었다. 즉 사람은 유전자의 절대적 명령에서 부분적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문화가 발전해서 사람이 유전자의 명령을 많이 거스르면서 자신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욕망의 추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특히 중요한 변화는 성욕이 생식과 분리되어 추구되기 시작한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자원을 얻으면, 사람들은 잉여 자원의 대부분을 자식을 낳아 기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는 데 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유전자의 강력한 명령에 저항하는 것이다. 이런 ‘육체의 반역’이 결혼과 가족에서 나온 일련의 변화, 특히 출산율의 급격한 저하의 근본적 요인이다.

행복을 궁극적 목표로 삼으면, 사람은 궁극적으로 불행해진다. 짙은 쾌락을 맛보지만 공허감이 따른다. 수단이 목적이 되어 진정한 목표의 성취에 따르는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행복을 찾는 길은 역설적으로 행복을 궁극적 목표로 삼지 않는 것이다. 대신 행복의 본질을 잘 살펴서, 행복이 봉사하는 궁극적 목표인 ‘자식농사’를 잘 짓는 것이다. 지금 세대는 상상하기 힘든 갖가지 고생을 하면서 평생을 보낸 우리 위 세대가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그리 큰 불평을 하지 않고 견디어낸 것은 바로 그런 사정 덕분이다.

모든 일에서 자식 위주였던 그분들은 자식의 처지가 나아지는 것을 유일한 행복으로 삼았다. 자식의 즐거움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얻는 부모를 보면, 우리는 ‘대리 만족’이란 말을 쓴다. 이 말은 적절치 못하다.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즐거움을 간접적으로 맛보는 것이 아니다. 자식이 삶을 즐기는 것은 부모에겐 자신들이 직접 맛보는 원천적 즐거움이다. 그것은 워낙 근본적이어서, 부모가 자신의 다른 욕망을 충족시켜서 맛볼 수 있는 즐거움보다 훨씬 깊고 크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누구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

현실적으로 행복해지려면, 적어도 불행해지지 않으려면, 모두 잘 아는 것처럼, 경제적 여유가 중요하다. 자신의 복지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고 좋은 짝을 찾아주는 데 긴요하다. 그래서 모두 기를 쓰고 돈을 벌기 위해 애쓴다. 돈 버는 것을 폄하하는 사람도 많다. 종교 지도자의 대부분이 그렇다. 그러나 세력이 큰 교단의 도움을 받는 종교 지도자들은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고 사회적 지위도 높다. 돈에 관한 한, 그들의 태도는 위선적이다. “돈을 버는 것보다 사람이 더 순진하게 일할 수 있는 길은 드물다”는 새뮤얼 존슨의 관찰은 어느 사회에서나 옳다.

물론 돈 버는 일에서도 진정한 목표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돈이 중요하고 돈을 버는 일이 힘들므로, 자칫하면 돈을 버는 것 자체에 매몰된다. 그래서 돈이 궁극적으로 행복의 한 요소고 삶의 궁극적 목표인 ‘자식농사’를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놓치게 된다. 돈을 벌 때 법과 도덕을 지키는 것은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우리는 ‘도덕적 동물’이어서, 법이나 도덕을 어기면서 돈을 버는 일은 삶의 진정한 목표를 훼손하게 된다.

부의 축적은 타인과의 관계가 결정

돈을 버는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는 일이다.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어 살고 문명이 발달해서 자연 환경의 영향이 많이 줄어들었으므로, 한 사람의 환경은 실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규정한다. 그래서 환경에 대한 적응은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것이 되었다. 주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은 이제 생존과 생식에서 결정적 중요성을 지닌다. 돈을 버는 것도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가능하다.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은 모두 절감하지만 무척 힘들다. 서점의 서가를 가득 채운 처세술 책이 그 점을 유창하게 말해준다. 이 일에서 가장 좋은 길잡이는 “당신이 바라는 것처럼 남에게 하라(Do to others as you would be done by)”는 조언이다. 흔히 ‘황금률(golden rule)’이라 불리는 이 얘기는 성경 <마태복음>에 나오는 산상수훈(山上垂訓)의 한 구절 “너희는 남에 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가 속화한 것이다.

황금률이라 불린 데서 드러나듯, 그것은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지혜를 담았고 그래서 모든 처세의 기법이 그것 속에 녹아 있다. 어짐(仁)에 관해서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마라 (己所不欲 勿施於人)”고 한 공자의 말씀도 뜻이 같다. 황금률은 원칙의 보편적 형태를 드러냈고, 공자 말씀은 원칙의 실천적 지침을 제시했다.

황금률에 담긴 지혜를 부인할 사람은 없을 터이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무척 힘들다. 누구에게도 나와 남이 똑같을 수는 없다. 게다가 자주 어울리는 사람들은 흔히 실제적 또는 잠재적 경쟁자들이어서, 서로 돕기보다는 서로 시기하고 견제하게 마련이다. 실제로 황금률을 실천하는 데서 가장 큰 장애는 시기심이다. 사회가 발전해서 소득이 크게 높아져도 여전히 많은 사람이 만족하지 못하는 까닭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런 시기심이다. 자신의 소득이 높아져도, 동료나 이웃의 소득이 더 높아지면, 우리는 배가 아프기 마련이다.

시기심은 진화의 산물이다. 지금 사람이 지닌 천성이 형성되었던 시기에 사람들은 작은 부족을 이루어 살았고 부족을 아우르는 상위 사회는 없었다. 그런 사회에서 개인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의 전반적 복지가 아니라 자신이 사회적 위계에서 차지하는 자리였다. 설령 자기 부족의 생활 수준이 다른 부족보다 훨씬 높았다 하더라도, 부족 안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지위가 낮으면, 탐나는 배우자를 얻어서 뛰어난 자식을 낳을 수 없었을 터이다. 자연히,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지위와 소득을 다른 사람의 그것과 비교해서 판단하도록 다듬어졌다. 자신이 남보다 사회적 지위가 못하다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려고 분발한다. 그런 분발을 가능하게 하는 심리적 에너지가 바로 시기심이다.

그러나 지나친 시기심은 모두에게, 특히 당사자에게 해롭다. 어떤 집단이든지 구성원의 협력을 통해서 목적을 이루고 조직을 유지한다. 지나친 시기심은 이런 협력을 해친다. 따라서 지나친 시기심을 보이는 구성원은 동료의 비공식적 따돌림이나 집단의 공식적 제재를 받게 된다.

다행히 우리에겐 시기심을 줄일 수 있는 본능도 있다. 비록 이기적 존재지만, 우리 마음엔 다른 사람을 보살피려는 이타심도 있다. 자식과 가까운 혈족을 보살피려는 마음씨는 자연선택에 의해 보존되어 왔으므로, 보기보다 뿌리가 깊고 언뜻 생각하기보다 훨씬 강력하다. 그런 이타심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선, 즉 상대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인 경우엔, 우리는 합리적 이기심을 통해서 다른 사람과 상호 협조관계를 맺을 수 있다. 내가 남에게 잘해주면, 나중에 남도 내게 잘해주리라는 기대는 자연스럽고, 실제로 그런 기대는 대부분 충족된다. 그런 상호 협조는 합리적이므로, 사회적 집단을 이루는 동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로 다른 종 사이에서도 공생의 형태로 나온다. 이처럼 이기주의에 바탕을 둔 이타적 행위들은 ‘상호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라 불린다.

“너무 약게 행동하지 마라”

1970년대에 미국 정치학자 로버트 액설로드(Robert Axelrod)는 컴퓨터의 가상 공간을 이용해서 협력에 관한 실험을 했다. 그는 ‘죄수의 양난(prisoner’s dilemma)’에 대한 전략을, 즉 프로그램이 다른 프로그램과 만날 때마다 협력할까 말까 결정할 때 기준이 될 규칙을, 구체화한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모집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여러 번 만나도록 했다.

그 경기에서 우승한 프로그램은 ‘되갚기(TIT FOR TAT)’라는 가장 간단한 프로그램이었다. 이름이 가리키는 것처럼, ‘되갚기’는 다른 프로그램과의 첫 대면에서 협력한다. 그 뒤엔 상대가 이전의 대면에서 한 대로 한다. 상대가 협력했으면, 자기도 협력하고, 상대가 배신했으면, 자기도 배신한다.

이 전략의 장점은 분명하다. 어떤 프로그램이 협력하려는 성향을 보이면, ‘되갚기’는 이내 그것과 우호관계를 맺고, 둘 다 협력의 과실을 누린다. 어떤 프로그램이 속이려는 성향을 드러내면, ‘되갚기’는 되갚아서 손해를 줄인다. 반면에, 배신의 큰 이익을 추구하는 프로그램들은 경기가 진행될수록 실패하는 경향을 보였다. 다른 프로그램들은 그것들에게 잘 대해주는 것을 포기했고, 그래서 그것들은 배신의 큰 이익과 상호 협력의 작은 이익을 함께 잃었다.

비록 앞을 내다보는 능력도 감정도 없지만, ‘되갚기’의 행동 양식은 사람의 그것과 아주 비슷하다. 따라서 그것은 상호적 이타주의가 자연 선택을 통해서 사회에 퍼지고 사회를 발전시킨 과정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액설로드의 실험은 결국 황금률을 지지한다. “남에게 잘해라. 그것이 바로 너 자신에게 잘하는 길이다.” 이보다 더 나은 처세의 원칙은 없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자식에게 가르쳐야 할 교훈이다. 액설로드는 충고했다. “너무 약게 행동하지 마라.”

우리는 잠재적으로 도덕적인 동물이다. 도덕적 동물이 되는 길을 고르는 것은 우리 몫이다. 우리가 그런 선택을 하는 순간, 우리는 그렇게도 다스리기 어려운 시기심을 다스리고 자신을 스스로 돕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길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이 드러난다. 우리는 모두 꿈꾼다, 소박하게 살면서 자식 낳아 잘 기르는 삶을. 비록 우리가 그렇게 살지는 못하더라도, 그런 꿈을 가슴속에 품는 것만으로도 조금은 덜 불행해지지 않을까?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지금 우리는 박목월 시인의 ‘산이 날 에워싸고’에 나온 두 세대 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래도 그 시를 때때로 낭송하는 것은 도움이 될 터이다.

글= 복거일, 그림= 조이스 진

복거일(卜鉅一) -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1967년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87년 소설 <비명을 찾아서> 발표. 이후 50여 권의 저술을 펴냄. 최근에는 소설 <한가로운 걱정들을 직업적으로 하는 사내의 하루>와 6·25 전쟁사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및 전기 <리지웨이, 대한민국을 구한 지휘관>이 있다.

조이스 진 - 연세대에서 생물학을 전공했고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2014년 봄에 첫 전시회를 가졌고 4월부터 <동아일보>에 <세상의 발견>이란 제목으로 그림과 글을 연재 중이다. <그라운드 제로><서정적 풍경 1,2><삶을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들> 등의 책에 삽화를 그렸고 연극 <아, 나의 조국> 의 미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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