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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 요약 ⑦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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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2호 1 면

황제로서 기회주의적이고 무력한 모습을 보였던 고종은 망국 후에는 오히려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중요도가 높아졌다. 고종이 갖고 있는 상징성 때문이었다. 황실을 복위시키려는 복벽파뿐만 아니라 민주공화파들도 고종 망명에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했다. 고종이 급서했기 때문이다.


일제가 편찬한 『순종실록 부록』에 이태왕(李太王·고종)의 와병 기록이 나오는 것은 1919년 1월 20일이다. 그러나 병명도 기록하지 않은 채 그날 병이 깊어 동경(東京)에 있는 왕세자에게 전보로 알렸다고만 기록하고 있다. 고종은 그 다음날 묘시(오전 6시)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는 것인데, 일제는 고종의 사망 사실을 하루 동안 숨겼다가 ‘신문 호외’라는 비공식적 방법으로 발표했다. 일제가 발표한 사인(死因)은 뇌일혈이었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사망한 데 대해 의혹이 일면서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었다. 고종독살설은 고종의 인산일에 3·1운동이 일어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이었던 독일 등이 지배하던 식민지 국가에만 해당하는 것이었지만 ‘민족자결’이란 언어 자체가 한국의 독립운동 세력에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8월 상해에서 결성된 신한청년당은 1919년 2월 파리 평화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했다. 신한청년당은 일본에도 조용은(趙鏞殷·조소앙)과 장덕수·이광수 등을 파견했는데, 이광수는 서울을 거쳐 도쿄로 가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919년 2월 만주에서 39명의 독립운동가는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는 항일 독립전쟁을 “하늘의 인도와 대동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신성하고도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규정했다. 1919년 1월 6일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은 도쿄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본 정부와 귀족원·중의원 및 각국 대사들에게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유학생 400여 명이 모여 조선독립청년단 대회를 개최했다. 이 선언서는 ‘합병 당시의 선언과 달리 일제는 정복자가 피정복자를 대하듯이 했으며 참혹한 헌병정치 하에서 참정권·집회·결사·언론·출판의 자유와 신교의 자유까지 억압당했다.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우리 민족은 영원히 일본과 혈전할 것이다. 우리 민족은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세계평화와 인류문화에 공헌하는 새 국가를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이런 와중인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붕어 소식이 전해졌다. ‘고종 독살설’은 불타오르던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 됐다. 3월 3일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백성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3월 1일의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재임 1910년 10월~1916년 10월)와 2대 총독인 하세가와(長谷川好道: 재임 1916년 10월~1919년 8월)는 첫째도 무력, 둘째도 무력으로 한국을 통치했다. 이런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과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민족자결주의가 제창되면서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었는데 이것이 전민족적인 3·1운동으로 결집된다. 1919년 1월 20일 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최린(崔麟)은 동대문 밖 천도교 소유의 상춘원(常春園: 현 숭인동)에서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기독교계는 당초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 방식을 계획했으나 천도교 측과 만나 독립선언을 하는 것으로 전환했다. 또 불교계도 참여시키기 위해 불교 혁신운동을 전개하던 한용운(韓龍雲)과 백룡성(白龍城)을 합류시켰다. 유림(儒林)도 참여시키기 위해 곽종석(郭鍾錫) 등과 접촉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경북 성주의 김창숙(金昌淑)과 접촉했다. 김창숙은 대신 전국 유림 134명 명의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파리장서(巴里長書)’를 파리평화회의에 전달하는 파리장서 사건(1919년 4월)을 일으켰다고 전한다. 손병희 등 천도교계 인사 15명, 이승훈·길선주 등 기독교계 인사 16명, 2명의 불교계 인사들이 민족대표 33인이 되는데, 준비과정에 깊숙이 개입했던 천도교계의 박인호(朴仁浩)· 노헌용(盧憲容), 기독교계의 함태영·김세환(金世煥) 등은 뒷일을 처리하기 위해 명단에서 빠졌다. 이들까지 포함하면 48인이 된다. ‘이종일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는 최남선 경영의 신문관(新文館)에서 활자를 만들고 천도교에서 운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에서 인쇄했는데 1, 2차 도합 3만5000장이었다. 서울 시내는 학생대표단이, 지방은 천도교와 기독교가 나누어 배포하기로 분담했다.


거사 전날인 2월 28일 오후 5시 서울 가회동 손병희의 집에서 23인이 참석한 가운데 마지막 모임을 가졌는데, 손병희와 최린의 ‘신문조서’ 등에 따르면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을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 손병희가 명월관(明月館) 인사동 지점인 태화관(泰和館)으로 장소를 변경했다고 전한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은 낮 12시쯤부터 태화관에 모여들었고, 파고다공원에도 수천 명의 시민·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생대표인 ‘강기덕 신문조서’에 따르면 누군가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더라도 “책임은 자기들(민족대표)이 진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고 전해 발표 장소와는 무관하게 책임은 민족대표들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전하고 있다.


최린은 ‘신문조서’에서 대표들이 태화관에 모여 있을 때 이미 종로 쪽에서 만세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태화관 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하지 않는데, 대략 이종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최린이 경무총감부에 전화로 독립선언 사실을 통보했으며, 총독부에는 이갑성이 김윤진을 보내 통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린은 ‘신문조서’에서 “선언서를 배부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한용운이 인사말을 하고 일동이 만세를 부르고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오세창은 ‘신문조서’에서 ‘한용운이 인사말을 하고 만세를 제창했다’고 전한다. 당시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으로서 파고다공원에 있었던 이의경(李儀景: 필명 이미륵)은 ‘압록강은 흐른다’에서 ‘갑자기 깊은 정적이 왔고 누군가가 조용한 가운데 연단에서 독립선언서를 읽었다……잠깐 동안 침묵이 계속되더니 다음에는 그칠 줄 모르는 만세소리가 하늘을 찔렀다. 좁은 공원에서 모두 전율했고, 마치 폭발하려는 것처럼 공중에는 각양각색의 삐라가 휘날렸고 전 군중은 공원에서 나와 시가행진을 했다’고 현장 분위기를 전하고 있다. 대한문 앞 광장에서 고종을 애도하던 각도 유생들은 물론 상인들도 철시하고 합류했다. 서울 거리거리마다 수십만의 인파가 독립만세를 부르짖었다.


만세시위에 당황한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는 3월 3일의 고종 장례식을 크게 우려했다. 조선총독부 관보(官報)는 하세가와가 3월 1일 ‘(고종 인산일에) 경거망동하거나 허설부언(虛說浮言)을 날조해 인심을 요란케 하는 것과 같은 언동을 감행하는 자는 본 총독이 직권(職權)으로 엄중히 처분할 것’이라는 협박 유고(諭告)를 발표했다고 전한다.


3월 5일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 연희전문학교 김원벽,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韓偉健) 등의 주도로 아침부터 남대문역(서울역) 광장 일대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발생했다. 3월 9일 서울 상인들은 “일체 폐점하고 시위운동에 참여하자”는 내용의 ‘경성시 상민일동 공약서(京城市商民一同公約書)’를 발표하면서 일제 철시에 나섰다. 또 독립선언식에 참석했던 학생들과 고종 인산에 참가했던 시민·유생들이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만세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만주와 러시아령 등 해외로도 파급되어 3월 12일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三源浦)에서 첫 시위가 발생했다. 다음 날인 3월 13일에는 이상설이 망명해 서전(瑞甸)서숙을 열었던 북간도 용정촌 서전평야에서 ‘독립선언 경축식’이 열렸다. 서간도의 유하(柳河)·통화(通化)·집안(輯安)·흥경(興京)·관전(寬甸)·환인(桓仁)·장백(長白)·안도(安圖)·무송(撫松)현과 북간도의 연길(延吉)·화룡(和龍)·왕청(旺淸)·훈춘(琿春) 등 한인들이 이주한 거의 모든 지역에서 독립선언 경축대회가 열렸다. 3월 17일에는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태극기를 앞세운 시가행진이 있었는데 독립운동가들이 건설한 신한촌에서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게양했다. 이뿐 아니라 니콜리스크·라즈토리노예·스파스코 등 러시아령 각지에서도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조선총독부의 『시정(施政) 25년사』는 1919년의 시위 횟수가 617건, 참가 인원 58만7000명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서울 57회 57만여 명, 경기 304회 67만여 명, 강원 57회 10만여 명, 충청 156회 12만여 명, 전라 216회 30만여 명, 경상 132회 11만여 명, 함경 94회 5만7000여 명, 평안 314회 51만여 명, 황해 120회 9만2000여 명 등 모두 1393회 195만4000여 명이다.”


일제는 평화 시위에 야수적인 폭력진압으로 대응했지만 이미 무단통치는 종말을 맞이한 것이었다. 일제 10년 지배의 총체적 파탄이 전 세계에 드러났다. 4월 들어서도 만세시위는 진정되기는커녕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4월 18일자에 “함경도 홍원군 보청면 삼호(三湖)에서 수백 명의 아동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는 기사가 실릴 정도로 변경의 어린아이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물론 일본 정부도 당황했다. 매국적(賣國賊)을 제외한 남녀노소 모두가 만세시위에 동참하면서 ‘한국민은 총독부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다’라던 선전이 사기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헌병경찰제를 주축으로 하는 무단통치를 시위의 주범으로 보는 시각이 생겨났다. 일본의 하라 다카시(原敬) 총리는 1919년 8월 19일 일왕(日王)의 명으로 반포되는 칙령(勅令) 386호를 통해 “조선총독은 문관 또는 무관 중에서 임용할 수 있다”고 밝혀 문관도 총독으로 임용할 길을 터놓았다. 또한 헌병경찰제도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고 관리 및 교원들의 장검 패용도 폐지시켰다. 원성이 자자했던 무단통치의 상징적 조치들은 조선 민중의 항거로 폐지되었다. 또한 한국인에게만 자행되던 태형(笞刑)도 1920년 4월 1일 폐지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관보 1919년 8월 18일자는 ‘조선총독 백작 하세가와와 정무총감 야마가타(山縣伊三)를 의원(依願) 면직하고 해군대장 남작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조선총독에 임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말만 문관총독 운운해놓고 다시 해군대장 출신의 무관총독을 임명한 사기극이었다. 일제는 1919년 8월 칙령으로 “조선 총독은 문관 또는 무관 중에서 임용할 수 있다”고 바꾸고서도 3대 조선총독으로 해군대장 출신의 사이토 마고토(齋藤實)를 임명했다. 여전히 한국을 군사점령지로 바라보는 시각이었다. 3·1운동 이후에 일본 안팎에선 ‘일본이 한국을 계속 통치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 이덕일,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제243호 2011년 11월 6일, 제244호 2011년 11월 13일, 제245호 2011년 11월 20일, 제246호 2011년 11월 27일, 제247호 2011년 12월 4일, 제248호 2011년 12월 11일.


제243호-북경 망명 준비하던 고종, 이완용 대궐 숙직 다음 날 급서


제244호-산업화?이농에 日 쌀난리 … ‘무력통치’ 데라우치 실각


제245호-3.1운동 민족대표는 ‘33인’ 아닌 ‘48인’이었다


제246호-하세가와 총독, 본국서 군대 지원 받아 시위 유혈 진압


제247호-요미우리, 조선소요 사태 풀기 위해 문치 전환 촉구


제248호-강우규 거사날, 민중 습격 두려워 조선총독부 건물 소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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