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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 부작용은 누가 책임지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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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리가 종종 써왔던 '성을 갈겠다'라는 표현은 실현되지 않을 상황을 전제로 자기의 정체성을 건 결의의 표현이었다. 그런데 성씨의 계통을 무너뜨린 호주제 폐지 이후 그런 말이 무의미한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성을 편의대로 바꿀 수 있어 성씨의 정체성이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성씨의 변경만이 재혼 가정의 행복과 안정을 담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인사들의 억지가 모든 가정과 가문의 계통을 허물 태세고 민족의 뿌리를 고사시키는 참극을 예고하고 있다. 이들은 본인에게만 적용할 특별법 제정 등의 보완책 마련에는 아랑곳없고 모든 이를 자신들과 같이 눈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성씨 변경 제도의 틀 속으로 밀어넣고야 말았다.

호주제 폐지론자들이 명분상 강조해 온 주장의 밑받침은 재혼 가정의 성씨 차이에서 오는 가족의 고통을 성씨를 바꿈으로써 해소시켜 주자는 것인데 이는 새로운 불씨를 야기한다. 과연 고통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 경우 이혼한 어머니가 자식을 데리고 재혼한 경우에 한정해 볼 수 있는데, 아이가 사회성을 갖는 성인인 경우나 초등학교 이상 진학한 경우, 그리고 그 이하 연령인 경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아이가 성인인 경우나 초등학교에 진학한 경우는 아이 본인의 입장에서는 성을 바꾸기를 결코 원치 않을 것이다. 성이 바뀌는 경우는 자신에 대한 자아분열과 자신을 아는 모든 주변 지인에게 자신의 가정문제를 드러내야 하는 심리적 부담을 감내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성을 바꾸지 않는 경우 본인의 가정문제는 본인이 밝히지 않는 한 노출되기 어렵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은 아이의 생활지도를 위해서 아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이가 사회성을 인지하기 전의 연령대에서는 개성(改姓)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자신의 친아버지를 감추거나 추후 아이에게 성 선택권을 돌려줘야 하느냐의 혼란한 문제는 여전히 남을 뿐아니라 어머니와 양아버지는 아이의 성씨를 두고 논란을 겪어야 한다. 어른들의 편의주의적이고 이기적인 발상이다. 성숙한 어른들이 감싸안고 헌신적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을 성씨의 은폐로 해결하려는 처사가 기막히다.

동거도 결혼의 형태로 보는 일부 서구의 경우와 이혼율에 있어 통계상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다. 성씨 변경은 이 추세에 기름을 붓게 될 것이다. 이들이 성씨를 개명하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 민족은 성씨의 본을 망각하게 되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다. 재혼 가정이 다시 결합하는 추세도 이렇게 끊긴 다리가 가로막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성숙함과 관용으로 포용해야 할 가족의 문제를 법 만능주의로 해결하려는 작태는 이제 그만 방황을 끝내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정형열 고려대 직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