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텔링] 징역6월 받고 도주한 그녀, 검거팀 닥치자 “강도야” 112 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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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의 한 일요일 오후 11시. ‘그 사람’의 휴대전화 위치신호가 울산시 울주군의 A공단 건설현장 인부 기숙사 주변에서 잡혔다. 회사에 전화를 걸어 그가 언제 인부 숙소로 돌아오는지 물었다. “곧 들어온다”는 대답을 듣고 즉시 김일호(36) 수사관과 서울중앙지검에서 만나 차를 몰았다. 이튿날 오전 5시. 현장에 도착하니 근처 화학공장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직원들은 아직 출근 전이었다. 어느새 오전 7시. 범인이 눈치를 채고 도망간 것은 아닐까 조바심이 났다. 그 사람이 곧 들어올 거라고 했던 현장 직원이 인부 명단을 뒤적이더니 무심히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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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찾는 사람이 김용운(가명·59) 맞아요? 우리 명단에는 ‘김영훈’밖에 없네. 그런 사람 없수.”

 아뿔싸. 다시 원점. 발밑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에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나는 서울중앙지검 ‘자유형 미집행자 검거팀’ 소속 김창수(36) 수사관이다. 검거 경력만 4년차다. 기획부동산 사기로 2억원을 챙겼다가 지난해 징역 1년형이 확정되기 직전 도주한 남자를 쫓고 있다. 그는 경북 포항과 울산의 공사장을 전전하며 1년째 도주 중이었다. 허탕은 쳤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근처 여관에서 쪽잠을 자며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김씨의 휴대전화 위치신호는 이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었다.

 “저희가 공사장에서 일을 좀 하고 싶은데 좋은 자리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오.”

 일감을 찾는 인부로 위장해 주변 공사장 20군데, 인력사무소 8군데를 돌며 김씨의 흔적을 찾았다. 포털사이트에서 출력한 종이지도에 조사한 곳을 형광펜으로 표시해 나가자 장소가 좁혀졌다. 김씨와 함께 사는 일용직 근로자도 어렵사리 찾아냈다. 잠복 끝에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김씨를 덮쳤다.

 김씨처럼 법원에서 징역형이 확정됐지만 집행 전에 도주하는 이들은 지난 10년간 2만 명에 달한다. 그중 60~70%만 검거됐다. 나머지는 형의 집행시효가 만료됐거나 해외로 도주했다. 불구속 기소된 피고인에게 실형을 선고하면서 법정 구속하지 않거나 구속 기소된 피고인을 보석으로 석방할 때 주로 발생한다. 최근 불구속 재판이 늘면서 도피범은 부쩍 증가하는 추세다.

 도망자 추적은 백사장에 떨어뜨린 바늘을 찾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장에서 작은 단서도 놓쳐선 안 된다. 한번은 탐문을 하던 중 어떤 집 현관문에 붙어 있는 손톱만 한 스티커 광고의 ‘양봉(養蜂)’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광고상의 휴대전화가 쫓고 있는 도주범과 함께 사는 친형의 번호와 일치했다. 벌꿀 사는 손님으로 위장해 형에게 접근한 뒤 은신해 있던 범인을 검거했다.

 도주범들의 검거 순간 반응은 다양하다. 울주에서 검거된 김씨는 갑자기 “몸이 아프다”며 눈을 감고 드러누웠다. 몇 해 전 검거한 한 사기범은 내가 들이닥치자 고시원 침대에 누워 손을 내밀면서 “나 좀 데려가 달라”고 울먹거렸다. “도망 다닌다는 압박감 때문에 절벽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다가 누가 방문을 열어 깼는데 그게 수사관님이었어요.” 그는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고맙다”고 했다.

 예상치 못한 변수도 많다.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도주한 전모(33·여)씨는 은신처로 찾아온 남자 수사관 2명을 강도로 착각해 112에 신고했다. 전씨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지역 여경과 합세해 그를 검거했다.

 형 집행도 공소시효와 마찬가지로 시효의 만료가 있다. 미집행자 검거는 시간과의 싸움이다. 도주범들을 쫓을 때는 잠도, 밥도 뒷전이다. 지난해 7월 검거된 금융 다단계 사기범 A씨는 2009년 징역 6월을 선고받고 도망쳤다. 5년 내내 가명을 쓰고 다니며 은신했다. 하지만 시효 만료를 하루 앞두고 친딸에게 전화를 했다가 은신처가 드러났다.

 “정부의 비자금 관리인”이라고 속여 3억원을 챙긴 혐의로 2009년 징역 2년을 선고받자 도주한 B씨도 본인 명의의 휴대전화와 자동차를 사지 않고 강원도 산골에서 5년간 숨어 지냈다. 그러나 시효 만료를 50일 앞두고 딸 명의의 휴대전화를 사용했다가 검거됐다.

 실패도 적지 않았다. 금융사기범을 잡기 위해 필리핀 마닐라까지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온 적도 있다.

 가장 기억나는 건 4년 전 새해 첫날 검거한 도주범이다. 그는 연말연시를 부인·아들과 보내기 위해 집으로 들어왔다. 내가 집 안으로 들이닥쳤을 때 가스레인지에는 그의 아내가 올려놓은 떡국이 끓고 있었다. 집에 두고 온 가족들이 떠올라 내 마음이 울컥했다.

 미집행자 검거는 수사와 재판, 선고가 끝나야 시작된다. 정식 수사가 아니고 형 집행 과정이라서 빛이 나지도 않는다. 하지만 범죄에 따르는 정당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다. 빛의 반대편에서 활동하는 ‘그림자 수사관’이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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