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문가 73% “한·일 갈등, 양쪽 모두 책임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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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1차 책임은 일본에 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한국의 책임도 있다.”

 과거사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일본 간의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미국 워싱턴의 대세는 양비론으로 기울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본지가 지난 14일 아베담화 발표 이후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헤리티지재단·우드로윌슨센터 등 미 정부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요 싱크탱크와 대학의 동북아 전문가 16명에게 “현재 한·일 갈등의 책임은 어느 쪽에 있다고 보나”란 질문을 던진 결과 73%(8명·무응답자 5명 제외)가 “양쪽(한국과 일본)에 책임이 있다”고 답했다. “일본에 책임이 있다”고 답한 이는 27%(3명)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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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성명을 주도했던 학계 인사 2명을 제외한 싱크탱크 전문가만을 대상으로 할 경우 ‘일본 책임론’을 편 이는 1명(제임스 퍼슨 우드로윌슨센터 한국연구센터 연구원)에 불과했다.

 이런 결과는 워싱턴 싱크탱크 내에 한국 전문가보다 일본 전문가가 훨씬 많은 탓도 있다. 그러나 “한국은 늘 골대가 움직인다(moving goal posts)”는 일본의 ‘골대론’ 공세에 한국 외교 당국이 논리적으로 잘 대응하지 못한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골대론은 “한국이 (위안부 문제 등에서) 요구하는 최종 합의점이 어디인지 명확하지 않고 국내 상황에 따라 요구가 수시로 변한다”는 일본의 주장이다.

 ‘양비론’을 펼친 미 전문가들의 의견은 대체로 “역사적으로는 일본에 90% 책임이 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일본에 60%, 한국에 40% 책임이 있다”(마이클 그린 CSIS 선임부소장)는 의견으로 압축됐다.

 백악관과 국무부에서 40년 이상 근무한 앨런 롬버그 스팀슨센터 선임연구원은 “일본의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지만 한국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양국의 노력이 요구될 때 모든 책임을 일본에 돌렸다는 점에서 역시 어느 정도의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아베 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역사 인식에 비판적인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교수도 “계속해서 정치적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한국도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했다.

  비록 소수이긴 했지만 일본의 반복되는 ‘역사 뒤집기’에 근본적 책임이 있다는 의견도 나왔다. 제임스 퍼슨 우드로윌슨 연구원은 “담화를 내놓은 뒤 또 다른 정치인들이 (담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난하는 게 일본”이라며 “일본의 ‘지킬과 하이드 신드롬’(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양면성)이 극복돼야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레그 브레진스키 조지워싱턴대 교수는 “일본이 한국에 대해 보다 진심을 담아 계속적으로 사과를 해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아베 담화’ 이후 한·일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선 ‘한·일 정상회담’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다. 빅터 차 CSIS 한국석좌는 “북한의 위협 증대 등 전반적인 전략적 이해의 관점에서 볼 때 과거사 문제뿐 아니라 다른 주요 문제들에 대해서도 (양국 지도자가) 머리를 맞대야 한다”고 지적했다.

 브루스 클링거 헤리티지재단 연구원은 “박 대통령과 아베 총리 모두 양국 내 민족주의적 요인을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하고 용감한 리더십을 보여준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며 “하지만 ‘아베담화’로 기회가 주어진 만큼 양국 지도자에게 그 같은 리더십을 기대해 본다”고 말했다. 조던 샌드 조지타운대 교수는 “박 대통령은 아베담화가 달갑지 않더라도 너그럽게 용서하고 관용을 베풀기를 바란다”는 의견도 있었다.

 양국의 현안인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 제안도 나왔다. 브래드 글러서맨 CSIS 퍼시픽포럼 이사(연구총괄소장)는 “일본 총리가 생존해 계신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제대로 배상을 하고 (사과)편지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일본은 한국 내 기금에 출연해 다시는 여성이 그 같은 모욕을 받지 않도록 구제해야 한다”고 했다.

 패트릭 크로닌 미국신안보센터(CNAS) 아시아태평양 안보소장은 “이제 정치의 영역뿐 아니라 (한·일 양국이) 인도적 분야나 인적 교류 및 학문적 교류를 통해 갈등을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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