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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북, 이희호 초청주체 김정은에서 '우리'로 슬쩍 바꿨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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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8일 일정을 마친 이희호 여사의 평양방문과 관련해 방북 초청 주체를 '김정은'에서 '우리'로 슬쩍 바꿨다. 북한은 이 여사 일행의 서울 귀환 직후 대남선전매체 '우리민족끼리' 에 실은 글에서 "이번 방문은 평양을 다시 찾고싶은 이희호 여사의 간절한 소망을 헤아려 좋은 계절에 즐겁게 휴식하기를 바라는 우리의 초청에 의해 마련됐다"고 밝혔다.

이는 지난해 12월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이 친서에서 "다음해 좋은 계절에 여사께서 꼭 평양을 방문해 휴식도 하면서 즐거운 나날을 보내게 되시기를 기대한다"고 직접 초청의사를 전달한 것과 차이가 난다. 정부 당국과 전문가들은 북한이 사용한 '우리'라는 표현이 좁게는 노동당 대남부서로 볼 수 있고, 넓은 의미로는 '북한 인민'으로 해석할 수있다고 본다.

북한에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뜻에 의해 이뤄진 남측 주요인사의 초청을 임의로 '우리' 등으로 바꾸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 때문에 북한 대남부서가 이 여사의 김정은 면담 불발에 따른 남한내 비판 여론을 의식해 뒷수습에 나선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93세 고령의 이 여사를 초청하고도 만나는 건 물론 친서나 다른 인사말조차 전하지 않고 무시한 김정은에게 "예의가 없다"는 비난일 것으로 예상되자 초청 주체를 조용히 바꿔버린 것이란 얘기다.

북한은 이 여사 일행이 평양에 도착한 5일 공항에 맹경일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내보냈다. 노동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라고 하지만 김정은 초청인사를 영접하기인 격이 떨어지는 인물이다. 게다가 환영만찬장에도 맹경일 호스트로 나옴으로써 더 이상 높은 급의 인사가 상대하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8일 평양 순안공항 환송과정에도 맹경일만이 나왔다.

북한은 그동안 박상권 평화자동차 사장 등 대북사업가들의 평양방문 때도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이나 원동연 제1부부장 등이 상대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함께 첫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으로 6.15공동선언을 발표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을 맞으면서 최소한의 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다. 특히 이 여사가 3년7개월전 김정은의 부친상(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때 직접 평양을 방문해 조문한 인사란 점에서 비판이 제기될 수 있다.

기대했던 김정은 면담이 불발된 때문인듯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 여사를 비롯한 방북단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이 여사는 2분 10초간의 짤막한 귀환 기자회견 발언을 했고, 방북단은 어떠한 질문도 받지 않고 자리를 떴다. 수행단장인 김성재 전 문화부 장관은 "김양건 비서를 만났느냐"는 질문에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지자 "여사님 말씀이 전부다. 더 이상은 없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번 방북을 주민대상 체제선전에 활용하는 모습도 드러냈다. 우리민족끼리는 "괴뢰당국의 비협조적인 태도와 보수세력의 위협공갈속에서도 결연히 방북길에 올랐다"고 주장했다. 서울 귀환 회견에서 "이번 방문은 박근혜 대통령의 배려로 가능했다"고 한 이희호 여사의 발언과 배치된다. 북한은 묘향산 방문 외에는 대부분 일정을 평양산원과 옥류아동병원, 육아원과 애육원, 양로원 등 김정은 시대들어 평양에 시범적으로 집중 건설되거나 체제선전에 활용되는 의료·복지시설 참관으로 짰다.

이영종 통일전문기자 yjlee@joongang.co.kr
[사진 김대중평화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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