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거리 된 어린이집 ‘사생활 보호 CCTV’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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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스더
사회부문 기자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이를 선택해 보겠습니다.” 보육교사가 모니터 중앙에 있는 여자아이를 마우스로 클릭하자 그 아이 주변의 화면이 뿌옇게 변했다. 선택한 아이의 모습만 선명하게 보였다. 하지만 영상 속의 아이는 계속 움직였고, 교사는 마우스로 계속 아이의 움직임을 쫓아야 했다. “아이가 움직일 때마다 계속 따라가야 합니다.” 교사가 이렇게 설명하자 지켜보던 이들이 허탈한 표정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지난 28일 오전 서울 구로구의 한 어린이집에서 열린 ‘어린이집 폐쇄회로TV(CCTV) 사생활 보호 프로그램 시연회’의 장면이다. 보건복지부가 주최한 이 행사에는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이명수·김현숙(새누리당) 의원의 보좌진과 서울시내 어린이집 원장, 업체 관계자 등이 참석했다. 복지부는 ‘학부모가 어린이집에서 CCTV 녹화 영상을 열람할 때 자기 아이만 콕 집어 볼 수 있는 기술’이라고 사전에 설명했다. 기자를 포함한 참석자들은 ‘어떤 최첨단 기술을 사용했기에 그런 게 가능할까’라는 의문과 기대를 품고 갔다.

한데 막상 시연회에 등장한 건 영상을 재생시킨 상태에서 보육교사가 보고자 하는 아이 얼굴을 마우스로 클릭하면 그 아이를 뺀 주변이 흐릿하게 처리되는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기술이었다. 업체 측은 “원래 한 곳당 1억원 이상 받아야 하지만 전국 4만3000곳의 어린이집에 다 깐다면 한 곳당 50만원만 내면 된다”고 이 화면 처리 프로그램에 대해 설명했다.

 시연회 개최 경위에 대해 물었더니 복지부 담당자는 “이명수 의원 측의 요청이 있어 어느 정도 개발됐는지 확인하려 했다. 우리도 어떤 기술인지 정확히 몰랐다”고 대답했다. 이 의원의 보좌관은 “학부모가 CCTV 영상을 볼 때 다른 아이들 초상권 침해가 예상되니 사생활 보호 프로그램을 의무적으로 설치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9월 19일부터 어린이집 CCTV 설치가 의무화되는데 그때 이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시행령을 만들자는 얘기였다.

 초상권 보호는 보육교사의 ‘마우스 추적’과 같은 현실 적용성이 떨어지는 프로그램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현행법상 마구잡이 열람을 방지하기 위해 경찰 동행과 다른 아이 부모 동의 등의 장치가 마련돼 있기도 하다. 순진한 어린이들 앞에 어른들의 욕심이 어른거리는 모습을 본 시연회였다.

글=이에스더 사회부문 기자etoile@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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