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볼륨을 높여요' 방송 3천회 이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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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끈으로만 어깨를 살짝 감춘 흰색 민소매 셔츠, 그 아래 쇄골이 그대로 드러나는 까무잡잡한 피부는 도발적인 그의 평소 이미지 그대로였다.

"운동하고 바로 와서 (화장을 못해) 이상하다"고는 했지만 뭔가 부끄러운 듯 눈을 완전히 가리도록 푹 눌러쓴 모자가 오히려 어색했다.

그런데 인터뷰를 하면 할수록 민소매 셔츠보다 눌러 쓴 모자가 그의 진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의 시선은 아랑곳 않고 마냥 튀기만 할 것 같은 탤런트 겸 DJ 이본(31)씨 얘기다.

이씨가 1995년부터 진행해온 '이본의 볼륨을 높여요'(KBS 2FM.89.1MHz.오후 8~10시) 가 오는 19일 방송 3천회를 맞는다.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 "1년 정도 하다 말겠지"란 예측 속에 시작한 DJ일이 벌써 8년을 넘긴 것이다. KBS 2FM에서 현재 3천회를 넘긴 프로그램은 유열의 '음악앨범'뿐이다.

"방송 시작할 때는 저도 1년이면 제 '기한'이 다 되겠거니 생각했어요. 그런데 6개월쯤 지났을 때 주변에서 '이본이 1년 만 채워도 인간승리'라고 말하는 걸 듣고는 1년이 아니라 2년은 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2년 지났을 때 또 같은 말을 하기에 4년 만 버텨야겠다고 맘먹었고요. 4년쯤 지나니까 이제 그런 말 하시는 분들이 없던데요."

술 잘 먹고 잘 놀게 생긴 화려한 외모 탓에 사람들은 이씨가 엄청난 성실성을 요구하는 생방송 라디오 DJ를 오래 하지 못할 것이라고 쉽게 단정했다.

술 한 방울 못한다는 이씨는 그럴수록 오기를 부렸다. 쏟아지는 청취자 사연을 집에 들고 가서 정리하는 것을 하루 일과로 삼고, 매일 오후 6시30분이면 어김없이 스튜디오에 나타나 오후 11시가 돼야 스튜디오를 나설 만큼 독하게 8년을 보냈다.

인터뷰 내내 이씨는 "내가 이렇게 성실한 애인 줄 나도 몰랐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스스로에게 놀라는 중"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의 장수비결은 단지 오기만은 아니다.

"꾸미지 않고 사람을 대할 수 있고, 또 브라운관 속 이본이 아니라 인간 이본으로 봐주는 분들을 만날 수 있는 자리라 애착이 간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대중들에게 보이는 자신의 도발적인 이미지에 지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봐주는 시선에 목말라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허상이 아닌 실체를 봐주는 사람들을 만난 것, 또 사람보는 안목을 키운 게 이씨가 DJ를 하면서 얻은 가장 값진 선물이란다. 그러나 DJ 이본이 꼭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저녁 시간을 완전히 투자하는 DJ생활 때문에 본업인 연기를 벌써 3년이나 접고 있다.

"본업이 연기자인데 전들 왜 좋은 작품에 대한 욕심이 없겠어요. DJ를 그만두는 조건으로 드라마 캐스팅 제의를 받을 때마다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방송을 해요. 그러면 오프닝 멘트부터 눈물이 줄줄 나요. 그런 나를 보면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면서 자꾸만 연기를 미루고 있는거죠."

"그동안 함께 일한 PD만도 스무명이 넘고, 남자 친구도 두 번 바뀌었지만 방송에 임하는 마음가짐만은 한결같다"는 이씨.

그는 지금도 첫 방송처럼 오후 7시59분이면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처럼 부담스럽지만 진솔한 청취자들 때문에 "10년은 채우고 싶다"고 말했다.

안혜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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