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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에 비폭력으로 맞선 그날의 행진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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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 흑인 인권 운동 다룬 ‘셀마’

1965년 3월. 미국 앨라배마주(州)에서는 7일과 9일 그리고 21일 세 차례에 걸쳐 약 2만5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시위대가 87㎞를 행진했다. 이들은 흑인 투표권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며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에도 굴하지 않았다. 전설적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1929~68)이 주도한 ‘셀마-몽고메리 행진’이다. 당시 시위는 끔찍한 유혈사태로 번졌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이어진 자유의 여정은 결국 흑인 참정권 보장이라는 큰 결실을 맺었다. 미국 인권 운동의 상징적 사건을 그린 영화 ‘셀마’(원제 Selma, 7월 23일 개봉, 에바 두버네이 감독)가 개봉한다. 올해는 셀마 행진 50주년이 되는 해. 미리 알아두면 좋을 사건 배경과 인물 이야기를 영화의 핵심 장면과 곁들여 짚어봤다.

50~60년대 미국 남부 앨라배마주는 흑인 인권 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벌어진 곳이다. 55년 흑백분리법에 반대한 몽고메리 운동부터, 63년 고용 관계에서의 인종 차별에 반대한 버밍햄 운동이 모두 앨라배마주에서 일어났다. ‘셀마’는 그곳의 작은 도시 셀마에서 벌어진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

65년 셀마의 흑인 인구는 도시의 반 이상을 차지했지만, 이들의 권리는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흑인의 입장을 대변할 정치인도, 이들을 평등한 시민으로 대하는 공공기관도 없었다. 미 수정헌법 15조는 이미 약 100년 전인 1870년부터 흑인 투표권을 명시했지만, 현실에선 지켜지지 않았다. 극 초반, 영화는 당시 흑인 투표자 등록이 어떤 식으로 이뤄지고 그들이 어떻게 투표권을 박탈당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준다. 흑인 중년 여성 애니 리 쿠퍼(오프라 윈프리)는 투표자 등록을 위해 백인 담당자의 질문에 따라 헌법 서문을 낭독하고, 모든 질문에 성실히 답한다. 하지만 그의 신청은 결국 기각된다. 카운티 판사 67명의 이름을 모두 대라는 억지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이런 일이 부지기수여서 셀마의 흑인 시민 1만5000명 중 투표권자로 등록된 사람은 350명에 불과했다.

<마틴 루터 킹이 셀마에 간 이유>

킹 목사가 셀마에 온 것도 이 때문이다. 몽고메리 버스 운동과 버밍햄 운동을 이끈 그는 64년 12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킹(데이비드 오예로워) 목사가 노벨평화상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장면에 연이어 앨라배마주에서 벌어진 한 테러 사건을 보여준다. 흑인 여자아이 네 명이 인종주의자가 설치한 폭탄으로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킹 목사는 흑인을 겨냥한 범죄가 그치지 않음에도, 이를 제지할 당국의 의지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셀마를 찾아온다. 그는 이 부당한 제도에 저항하기 위한 방편으로 비폭력 평화 행진을 구상한다.

영화는 이후 킹 목사의 주도로 열린 3차 평화 행진을 차례로 보여준다. 경찰의 무력 진압으로 시위대 수십 명이 폭행당한 ‘피의 일요일’ 사건부터, 시위를 돕던 백인 목사가 인종주의자들에게 구타를 당하고 사망한 사건 등을 생생하게 전한다. 킹 목사는 끝까지 비폭력으로 맞서고, 결국 시위대는 세 번째 행진 만에 주지사가 있는 몽고메리에 도착한다. 이 행진이 미 전역에 보도되고, 시위 지지자들이 불어나자 린든 존슨(톰 윌킨슨) 대통령은 그해 8월 6일 흑인 참정권을 인정하는 투표권법(Voting Rights Act)에 서명한다.

<킹 목사와 존슨 대통령, 가깝고도 먼 사이>

‘셀마’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킹 목사와 미국 36대 대통령 린든 존슨(1908~73)이다. 영화는 셀마 행진이 끝나기까지 둘의 대립을 중점적으로 보여준다. 킹 목사와 존슨은 셀마 행진이 벌어지기 1년 전, 힘을 모아 미국 민권법(Civil Rights Act)을 통과시킨 바 있다. 공공장소에서 인종 차별을 금지하는 법이다. 하지만 존슨 대통령은 영화 막바지까지 흑인 투표권 운동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인다. 연방법으로 투표권을 보장해 달라는 킹 목사의 요구에 존슨은 “경제 법안 처리가 우선”이라며 거절한다. 또 미 연방수사국(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딜란 베이커)에게 킹 목사를 감시하라는 지시까지 내린다.

올해 1월 미국에서 영화가 개봉되자, 당시 존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이었던 조셉 A 칼리파노 주니어는 “극 중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며 항의했다. 하지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킹 목사의 자서전에 기록된 내용과 당시 존슨 대통령의 뉴욕 타임스 인터뷰 발언을 들어 “‘셀마’는 충실한 조사를 바탕으로 각각 주요 인물의 입장과 대응을 균형 있게 그렸다”고 평가했다. 실제 두버네이 감독은 FBI가 당시 킹 목사를 감시하면서 남긴 1만7000장 분량의 자료를 참고해 각본을 완성했다고 밝혔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또 다른 이유는 킹 목사를 다층적으로 그렸다는 점이다. 극 중 킹 목사는 계속되는 시위와 수감 생활, 가족에 대한 책임감 등으로 좌절하고 고뇌한다. 셀마 행진으로 수감됐을 때, 그는 동료에게 흑인 운동가들이 살해된 사례를 들며 자신의 앞날을 비관한다. 또 깊은 밤에는 흑인 가스펠 가수에게 전화를 걸어 찬송가를 불러달라고 부탁할 만큼 감성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반면 시위를 밀어붙이는 모습에서는 강단 있는 면모가 두드러진다. “매일 아침 신문 1면에 시위 현장이 보도돼야 한다”며 소위 ‘그림’을 따지는 킹 목사의 모습은 근엄한 성직자라기보다는 주도면밀한 현장 운동가에 더 가깝다. 미국 일간지 워싱턴 포스트는 “극 중 킹 목사는 성인(聖人)이 아닌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런 킹 목사를 그린 덕에 셀마 행진이 더 사실감 있게 전달된다”며 극찬했다. 극 중 등장하는 그의 연설은 60년대 실제 킹 목사의 연설문과 약간 다르다. 여러가지 저작권 문제가 얽혀 있어, 두버네이 감독은 영화에 맞게 연설문을 새로 썼다. 워싱턴 포스트는 “문자를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연설 내용에 더 집중하게 된다”고 평했다. 킹 목사를 연기한 데이비드 오예로워 역시 목소리를 흉내 내는 대신, 자신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했다. 그는 “셰익스피어 희곡 주인공과 같은 카리스마로 스크린을 지배했다”(가디언)는 평을 받았다.

<브래드 피트·오프라 윈프리가 제작>

지난 3월 셀마시(市)에서는 셀마 행진 50주년 기념 행사가 열렸다. 행사에 참석한 미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지난 50년간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만, 인종 차별은 여전히 존재한다”며 “셀마의 행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지금도 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관련 사건을 암시한 말이다. ‘셀마’ 촬영이 끝난 지난해 7월, 길거리에서 담배를 팔던 흑인 중년 남성이 백인 경찰관의 과잉 진압으로 사망했다. 한 달 뒤,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는 10대 흑인 소년이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오예로워는 “‘셀마’는 역사적 사건이 아닌, 현재 미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영화”라며 “‘셀마’가 보여준 선조의 용기를 보고, 많은 사람이 희망을 얻길 바란다”고 말했다. 출연과 제작을 동시에 맡은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인들에게 지금 필요한 건, 루터 킹과 같은 리더”라고 말했다. 참고로 이 영화는 윈프리와 배우 브래드 피트의 힘으로 완성됐다. 2008년 ‘셀마’의 각본을 본 피트가 제작 및 투자를 결정했고, 지난해 윈프리가 또 다른 투자자로 제작에 합류했다.

글=윤지원 기자 yoon.ji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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