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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역사] 귀한 광어를 ‘국민 횟감’으로…양식 기술 개발한 청학동 소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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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채 전 국립수산과학원 연구관

지난 15일 조기채씨를 국립수산과학원에서 만났다. 그의 발 아래로 후배 연구자들이 키우고 있는 ‘킹넙치’가 보인다. [김경록 기자]

“안 갈 낍니더” 마지못해 간 수산대학서 평생 길 찾아
80년대만 해도 참 비쌌던 광어…"1kg 10만원 했어요"
재래식 화장실에서 구더기 잡아다 먹이며 양식 성공

‘물고기의 사는 꼴을 글로 써서 흑산의 두려움을 떨쳐낼 수도 없고 위로할 수도 없을 테지만, 물고기를 글로 써서 두려움이나 기다림이나 그리움이 전혀 생겨나지 않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세상을 티끌만치나마 인간 쪽으로 끌어당겨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김훈 『흑산』中에서.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黑山)에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펴냈다. 조선시대에도 물고기는 연구 대상이었다. 그게 지금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지금 여기 평생 물고기를 연구한 한 사내가 있다. 넙치(광어)를 ‘국민 횟감’으로 만든 조기채(60) 연구관 얘기다. 지난달 국립수산과학원을 정년퇴직한 조 연구관의 지난 인생길을 따라가 봤다.

그가 원했던 건 아니었다. “배 타는 학교는 안 갈낍니더.” “배 타는 기 아이고, 학문하는 학과다.” 1975년 1월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잇따른 대학 낙방 소식에 낙심하고 있던 차였다. 그때 고3 담임에게 편지 한 통이 왔다. 2년제 ‘통영수산전문대학’에 가라는 얘기였다. 담임교사의 설득에 결국 그러기로 했다. “그 당시 선생님 친구분이 그 학교 교수라, 그리된 것 같아요.”

 그의 집은 경남 하동군 청학동에서 삼대가 함께 사는 집안이었다. 조부모와 부모, 5남매가 함께 살았다. 논 200평, 밭 300평이 전 재산이었다. “동네 사람들이 부모님 보고 미친 사람이라 했어요. 우리 동네선 논 1000평, 2000평 가진 사람도 초등학교만 보내는데 무슨 호강하려고 중·고등학교까지 공부시키느냐고 비아냥댔죠.”

 담임교사의 권유대로 수산대학에 가기로 했지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이 돼서야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통영에 있는 학교 정문에 도착하니 마감 시간은 이미 지나 있었다. 경비원에게 “버스 뒷바퀴가 펑크나 늦었다”는 서툰 거짓말까지 해가며 교무실만 들여보내 달라 사정했다. “다행히 교무처장을 만났지만 접수 시간에 늦었으니 내일 교수협의회에서 상의해 보겠다고 했어요. 일주일 뒤 합격 소식이 왔습니다.”

동네서 욕 먹을까봐 못 그만둔 수산 공부

처음 학교생활은 쉽지 않았다. 함께 들어온 동기들은 대부분 수산전문고를 나왔다. 그는 수산에 관해 관심도 없었고 아는 것도 많지 않았다.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했으니, 수업 때 배우는 꼬막, 백합, 바지락이 머리에 그려지지 않는 거예요.”

 방학 때 고향 집에 가지 않았다. 통영 앞바다에 가서 조개껍데기를 주워 모았다. 씻어 말려서 큰 도화지에 올려놓고 패류 도감을 봐가며 이름을 외웠다. “이걸 계속 해야 하나, 그만둬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동네 어르신들한테 부모님 욕먹을까 봐 차마 그만두진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공부했죠.”

 2학기 때부터는 수산 공부가 재밌어졌다. 성적도 상위권에 올라섰다. 한 해 뒤 국립수산진흥원(현 국립수산과학원) 국가 연구직 5급 공개채용 시험을 치렀다. 지금으로 치면 9급 공무원 자리다. 연구직 4·5급 시험에 70여 명이 지원했는데 합격자 15명 안에 들었다. 졸업 앞두고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합격 소식을 알았다. 동네 사람들은 내심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대학 졸업한 77년에 국립수산진흥원 근무를 시작했다. 다닌 지 6개월 만에 군대에 갔다. 경상도 사내는 강원도 양구에서 36개월 있었다.

겨우 13마리로 시작한 광어 양식 연구

제대 후 복직한 그는 ‘주문진 수산종묘배양장’ 발령이 났다. 강원도에서 일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홉 살 터울 큰형에게 다른 직장을 알아봐달라 했다. 그런데 형수가 타일렀다. “형수님이 ‘도련님, 형님이 직장 구해놓는 게 시간 걸리니깐, 한 달만 놀다 오세요’ 하면서 용돈 하고 보따리를 내주셨어요. 정말 한 달 후 돌아오려고 했죠.”

 막상 가니 그게 안 됐다. 배양장에서는 전복·멍게의 종묘 생산기술을 개발하라 했다. 종묘는 아주 어린 새끼를 말한다. 쉽게 말해 양식할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내라는 의미다. 그는 먼저 어민들이 잡은 싱싱한 수·암컷을 받았다. 이 녀석들은 꼭 밤 12~1시가 돼야 알을 낳았다. 정자·난자를 받아 수정시키고 수정란이 담긴 물을 계속 바꿔줬다. 그러다 보면 새벽 4시가 넘기 일쑤였다.

 수정란에서 새끼를 얻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패하면 처음부터 다시 했다. 졸린 눈 비벼 가며 6개월을 보내고 드디어 전복 새끼를 얻는 데 성공했다. 멍게에서 수정할 정자·난자 얻어내는 새로운 방식도 찾아냈다. 80년 말 전복 새끼를 주문진 어민들에게 분양했다. 전복 양식에 성공한 건 북제주 종묘배양장에 이어 그가 있던 주문진배양장이 국내에서 두 번째였다. 덕분에 강원도 어민들은 전복 양식을 할 수 있게 됐다. 그는 이 시기에 군인이었을 때부터 사귀었던 부산 아가씨와 결혼해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곳에서 3년을 보냈다.

15년 3개월간 조기채씨가 근무했던 거제 수산종묘배양장 모습.

 다시 부산 본원에 내려갈 기회가 왔다. 이때 민병서 거제 배양장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같이 일할 의향이 없느냐고 했다. “거제는 어류를 전문으로 하는 배양장이었거든요. 어류가 앞으로 발전성이 있다 생각해서 합류하겠다 했죠.” 83년 3월, 그의 본격적인 어류 연구는 이때 시작됐다. 이전보다 더 심한 고생길도 함께 말이다.

 거제 외포리 포구에서 멀리 어선만 나타나도 알았다. 배에 달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곡이 뭍에까지 들리면 잡은 넙치가 배에 있었고 소리 없이 들어오면 넙치는 없었다. 지금이야 ‘국민 횟감’ 소릴 듣는 저렴한 물고기지만 그때는 극진한 대우 받던 귀한 놈이었다. “당시 돈으로 1㎏당 8만~10만원 했지요. 아마.”

 당시 거제 배양장은 넙치 양식에 도전했다. 양식할 새끼 넙치를 얻으려면 싱싱한 어미들이 있어야 했다. 넙치 산란기인 4~6월에 연구원들은 2인 1조로 나뉘어 민박을 얻고 외포리 포구에서 격주로 살았다. 그땐 넙치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씨가 마른 상황이었다. “거제에 간 첫해부터 2년 동안 산란기 때마다 포구에 가 살았어요. 그래서 수컷·암컷 합쳐 50여 마리를 구했죠. 그중에 그나마 살아서 연구에 쓴 녀석들이 수컷 2마리, 암컷 11마리 해서 총 13마리뿐이었어요.”

 배양장 생활은 쉽지 않았다. 관사에 살았는데 새벽 5시면 민병서 배양장장으로부터 인터폰이 왔다. 아침밥은 아침 8시에 잠깐 집에 들어가 먹고 나왔다. 물고기를 살피고 연구하는 일 외에도 수조며 연구 도구들을 그를 포함한 연구원들이 직접 만들었다. 배양장 마무리 공사가 아직 덜 된 상태였으니 부족한 게 많았다. 저녁밥은 일이 끝나는 밤 10시가 돼서야 먹을 때가 많았다.

본원 간부들에게 광어 양식을 설명하고 있는 조기채씨(오른쪽에서 세번째).

구더기·된장·달걀…광어야 너 뭐 먹니

매일같이 넙치 연구에 매달렸지만 연달아 난관에 가로막혔다. 넙치에게 먹이인 전갱이를 먹게 하는 건 중노동이었다. 자연에서 잡힌 넙치는 냉동 물고기를 먹지 않았다. 사람 그림자만 보여도 도망가버렸다. “전갱이를 가는 철사에 끼워서는 넙치 앞에다 놓고 요래 알랑알랑 살아서 움직이는 흉내를 내요. 한 시간 동안. 보통 일이 아니었어요.”

 85년, 고생 끝에 넙치 새끼 13만 마리를 얻어냈다. 종묘 개발에 성공했다. 그러나 키우는 게 문제였다. 사람도 태어나자마자 밥부터 먹일 수 없는 것처럼 넙치도 마찬가지다. 그에 맞는 먹이가 필요했다. 넙치 새끼에게 동물성 플랑크톤을 먹여야 했다. 그 동물성 플랑크톤이 먹어야 할 식물성 플랑크톤도 필요했다. 국내엔 없었다. 선배가 일본에서 조그마한 병 두 개에 플랑크톤을 몰래 들여왔다. 이제 배양하는 일이 남았다. 그와 연구원들은 거제도 노자산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 부엽토(낙엽이나 풀이 썩어서 된 흙)를 모아 왔다. 그걸 압력솥에 물을 넣고 쪘다. 그렇게 얻은 진액을 식물성 플랑크톤에게 먹여 키웠다.

 부화하고 30일 지난 넙치 새끼들에게는 조금 더 큰 먹이가 필요했다. 그는 재래식 화장실을 찾았다. 씨알 작은 구더기를 붓으로 담아 비커에 모았다. 그걸로 모자라 재래식 된장을 체에 걸러 먹이로 쓸 알갱이를 모았고 달걀노른자만 물에 풀어 그것들을 먹였다. 당시 국내에는 먹이 개발이 안 돼 있었다. 먹이 개발도 그를 포함한 연구원들 몫이었다. 그렇게 해서 키운 넙치를 4개월 만에 바다에 보냈고, 그중 큰 녀석들은 남겨놨다. 300~400마리를 계속 키웠고 2년 만에 이들에게서 알을 또 얻었다.

 90년 들어서면서 어민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인 양식 교육을 시작했다. 무상으로 수정란을 분양했고 6~10개월간 배양장에서 어민들을 가르쳤다. “당시 넙치 양식업자 중에 저를 모르는 사람 없었지요. 93~94년 남해안 일대에 230여 곳, 제주도는 150여 곳, 동해안은 50여 곳 넙치 양식을 했습니다.”

 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넙치는 사람들이 비교적 값싸게 즐기는 횟감이 됐다. 광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 98년 6월, 그는 부산 국립수산과학원 본원으로 왔다. 넙치 연구의 성과로 진급하면서였다. 거제도에서 15년 3개월을 산 후였다.

전복·멍게·광어 이어 세계 최초로 참조기 종묘 개발
부안 백합, 여수 참꼬막 양식 산업화 못한 건 아쉬움
6월 정년퇴직…“연구 어떻게 그만둡니꺼” 다시 연구원으로

국립수산과학원에서 38년 3개월을 일한 조기채씨는 여러 수산물의 양식 기술을 개발했다. 사진은 그가 양식에 성공했던 수산물들이다. 왼쪽부터 전복, 멍게, 광어, 참조기. [사진 국립수산과학원]

참조기 수조 옮기다 두 번이나 죽을 고비

본원에서 3년 있다가 2001년 2월, 전라북도 ‘부안 수산종묘배양장’의 장으로 갔다. 2003년 이번에는 참조기 종묘 개발에 나섰다. “참조기 연구를 시작하니 사람들이 넙치 성공하더니 참조기로 이미지 구축하려 한다, 쇼한다 그랬어요. 그게 약이었지요. 실패하면 미련 없이 과학원 떠나자 결심했습니다.”

 영광 법성포 앞바다의 칠산도 갯벌에다 그물을 치고 참조기를 잡았다. 그물 칠 곳까지 경운기로 가니 바퀴가 갯벌에 빠졌다. 650만원을 들여 수조 단 트랙터를 샀다. 갯벌에 오후 5시에 나갔다가 그물에 걸린 참조기를 가지고 밤 9시에 나왔다. 1t 트럭에 1.5t의 참조기 수조를 싣고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타이어가 터져 두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참조기는 넙치보다 키우기가 더 까다로웠다. 물 밖에 꺼내만 놔도 부레가 입 밖으로 튀어나와 죽었다. 사람 발소리에 놀라 연구실 수조 밖으로 튀어나오는 일도 많았다. 참조기 수조가 있는 연구실에 들어설 때는 신발 벗고 맨발로 살그머니 들어가야 했다. 그나마 넙치를 키웠던 경험이 있어 다행이었다. 연구 시작한 지 2년 만인 2005년 5월 13일 참조기 종묘 개발에 성공했다. 우리보다 수산 연구가 10년 앞선다는 일본도 못한 일이었다. 세계 최초였다.

광어를 살피고 있는 조기채씨.

 그 해 8월 서해연구소 양식과장이 됐다. 2년 후인 2007년 12월 태안 기름 유출 사고가 터졌다. 피해 현황 조사팀에서 총괄책임을 맡았다. 2010년까지 6개월마다 피해 상황을 발표했다. 그 후 통영의 남동해 수산연구소장으로 부임했다. 2013년 통영 연안에 대규모 적조가 일어났다. 200억원이 넘는 어민 피해가 발생했다. 여기서도 그는 피해를 조사하고 보상하는 일에 참여했다. 지난해 7월까지 그곳 소장으로 있었다. 이후 부산 본원으로 돌아왔다가 지난 6월 퇴직했다.

 그는 부안 특산품인 백합을 양식 산업화 못 하고 나온 게 아쉽다 했다. 평생을 수산 연구에 바쳤지만 여전히 안타까운 일들이 남아 있다. “그 유명한 여수 참꼬막이 멸종 상태고, 서민 밥상 단골 메뉴였던 명태도 안 나고 있고, 통영·고성 특산품인 굴 육종(기존 품종의 개량)도 해야 하는데….”

 그는 9월부터 경상남도 수산자원연구소 전문연구위원으로 일할 예정이다. “연구원은 연구하는 사람 아닙니꺼. 연구할 게 이리 많은데 어떻게 그만둡니꺼(웃음).” 그의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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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조한대 기자 cho.handae@joongang.co.kr
사진=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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