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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인문학 코드로 읽는 한.중.일

중앙일보

입력

인문학의 국제 전도사
인문학 바람이 불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경제관계가 두터운 한중(韓中) 사이에 인문학적 교류를 강조하였다. 비즈니스도 중요하지만 한중 양국의 국민들 끼리 ‘사람 사는 방식’을 서로 이해하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다. 인문학의 국제화다.
얼마 전 서울의 어느 모임에서 회원들을 대상으로 인문학강의를 요청해왔다. 내가 외교관 출신으로 특히 중국과 일본 근무를 길게 한 것을 알고 강연제목으로 아예 ‘인문학 코드로 읽는 한.중.일’라고 정해 주었다. 엉겁결에 수락을 해 놓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나름대로 정리해 보았다.
대기업에서도 기업 경영에서 인문학에 애착을 보이고 있다. 인문학에 대한 이해가 취업준비생의 운명을 가를 것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인간에 관한 학문’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휴머니즘이라고 한다. 휴먼(human) 즉 인간을 알자는 이야기로 보인다. 왜 인간인가. 과거 유럽의 중세를 암흑기라고 불렀다. 인간의 문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는 신(神)이었다. 신본주의(神本主義) 즉 신이 중심이 된 시대였다. 그 후 학자들이 사람 중심의 문화 즉 휴머니즘 인본주의(人本主義)로 발전시켰다고 본다.
한자문화권에서 ‘인문(人文)’이란 글자 그대로 사람에 대한 무늬(紋)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피부에 새기는 무늬는 문신(紋身)이지만 인문은 마음에 새기는 문심(紋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에게는 몸과 마음이 있다. 인문은 마음에 대한 학문이다. 사람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는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하지만 의식주 해결을 위한 활동은 몸에 관련되어 인문이 아니라고 본다. 대학에서도 상과(商科)며 공과(工科)는 의식주 해결을 위한 학문이므로 비인문학으로 분류하고 이와 다른 문학 역사 철학(文史哲)등을 인문학으로 분류한다. 몸이 있어야 마음이 있다. 인문학을 제대로 하려면 의식주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리베랄한 인문학
나와 인문학과의 관계는 무엇일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 간 대학이 문리과(liberal arts and science) 대학이었다. 문리과 대학은 리베랄한 학문을 배우는 곳이다. 리베랄은 무엇인가. 돈에서 자유롭다(liberal)는 것이다. 공대와 상대는 비즈니스 학문이지만 문리대는 비즈니스(돈)와 상관없는 학문이라는 뜻도 된다. 그래서 집안이 먹고 살만한 부유층의 자제가 들어 와서 자유롭게 사색하면서 공부하는 귀족학교가 문리과대학이다. 취직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문리과대를 졸업하면 고등룸펜(失業者)이 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이었다.
인문학은 이상을 추구하는 연애와 같다면 비인문학은 현실을 중시하는 결혼에 비유될까. 그래서 문리과대를 졸업한 동문들은 취직하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웠다. 인문학을 공부한 사람으로 주로 언론계 교수 등으로 진출하지만 공급에 비하여 수요가 턱 없이 부족했다.
나는 다행히 외교관이 되면서 여러 나라를 여행하거나 주재하면서 폭 넓은 인문학의 소양을 갖출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특히 외교관의 경험에서 깊이 있는 인문학은 여행에서 얻어진다는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여행으로 얻어지는 인문학의 힘
집을 떠나 여행을 하면 위험한 고비도 수없이 겪는다. 더구나 교통이 나쁘고 치안이 좋지 않은 옛날에는 여행 자체가 생사(生死)를 넘나드는 위험한 일이었다. 외교관을 ‘디플로맷’으로 부르는 것은 디플로마(diploma 접는 문서)를 휴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디플로마는 위험한 여행이 전제되는 해외로의 출국 또는 해외에서의 입국 증명서였다.
얼마 전에 타계한 싱가포르의 리콴유 전 총리는 아시아의 3대 거룡(巨龍)으로 한국의 박정희, 중국의 덩샤오핑(鄧小平),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를 꼽았다. 세 사람 모두 젊은 시절 해외여행을 많이 한 공통점이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직을 그만두고 당시 만주국 군관학교에 공부하고 나중에 도쿄의 일본 육사에서도 유학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중국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도 10대에 근검공학(勤儉工學)케이스로 프랑스에서 유학하였고 후에는 모스크바의 중산(中山)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요시다 수상은 외교관 출신이라 해외여행 자체가 직업이었다.
나는 30년간의 외교관 생애에 있어서 20년을 해외 공관에 근무하였는데 그 중 중국에서 9년 일본에서 6년 모두 15년을 동북아시아와 관계를 맺었다. 중국과 일본은 한자 문화권과 불교 및 유교문화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러한 황금 같은 기회를 이용, 중국과 일본에서 일반 서민을 접촉하고 여론 형성자(opinion leader)들과도 어울리면서 그들의 역사와 사는 방식을 이해하기 위해 한중일 3국의 공통되는 인문학적 코드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일본과 중국의 역사와 사는 방식
첫 임지인 일본 도쿄(東京)의 한국 대사관 근무 시 역사 탐방회를 조직하였다. 역사를 잘 아는 일본인 선생 두 분과 함께 우리 대사관 직원 5-6명이 월 2회 정도 주말에 도쿄 근처 역사의 현장을 찾는 것이다.
도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7세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후 일본을 통일하고 자신의 세력 근거지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에서 집권하여 400년 이상 된 고도(古都)이다. 메이지(明治) 유신의 현장이기도 하여 일본과 한반도와의 관계를 탐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역사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일본인 선생의 설명을 들으면서 20세기 일본의 아시아 침략의 잘못된 배경을 알 수 있었다.
10년 후에는 일본 나고야 총영사관 근무 시에는 현지의 어피니언 리더들과 월 1회 역사좌담회를 가졌다. 당시 KBS방송국의 ‘역사스페셜’ 프로그램 중 한일 양국에 관계되는 내용을 녹화하여 일본인들과 같이 시청하면서 역사 토론회를 가졌다. 10년 전 도쿄에서는 일본역사의 현장에서 일본의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바라보았다면 나고야에서는 한국의 입장에서 한일관계를 바라본 기회였다. 일본인 참석자는 대개 30-50인 규모였다.
현지 공관장으로서 역사 좌담회를 조직 운영하면서 3년간 34회의 기록을 책자로도 발간 일본 전국 대학과 도서관에 배포하였다. 비교적 객관적인 현장의 한일관계의 기록을 누구나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중국의 베이징 한국 대사관 근무 시에는 매주 화요일 왕징(望京)의 ‘재중한국인회’ 회관에서 ‘화요(총영사)사랑방’을 개설하였다. 중국진출 한국인과 조선족 동포를 대상으로 한중 문화의 이해를 통하여 한중 인문학적 교류에 필요한 지식을 터득토록 도왔다. 중국에는 비즈니스에도 유상(儒商)이 있고 견리사의(見利思義 이익을 보면 의리를 생각한다)의 철학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했다.
베이징의 주요 대학으로부터 특강 요청의 기회를 이용 중국 대학생과 인문학적 교류를 강화하였다. 한국의 단오제의 유네스코 등록에 대해 당시 중국 대학생들이 잘 못 알고 있는 사항이나 한중 관계에 전반에 대한 솔직한 의견으로 미래 세대의 이해를 넓혀 나갔다.

한.중.일을 관통(串)하는 인문학 코드
나는 일본과 중국에서 현지의 많은 유식자를 만난 경험에서 과거 동일한 인문 코드가 변질되어 같은 어휘라도 나라에 따라 쓰임이 다른 것은 뭔가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가 있어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수 천 년 내려오면서 중국이 그려 놓은 무늬(紋)에 한국과 일본이 독창적으로 변형 시킨 것이 오늘의 한중일 삼국의 문화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우선 정종(正宗)이라는 말을 예로 들어 보자. 정종은 ‘마사무네’라는 일본의 대표적인 일본 술(日本酒) 브랜드이지만 중국어로는 원조(元祖)라는 뜻이 있는 보통 명사(또는 형용사)이다. 에도시대 일본 고베(神戶)의 로코산(六甲山) 근처에서 새로운 술을 만든 사람이 브랜드(상표)를 얻기 위해 사찰을 찾았다. 그날따라 정작 스님을 만날 수 없어 스님 앞에 놓인 책의 제목 일부로 보이는 ‘정종(正宗)’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외워 와서 새로운 술의 상표를 정했다는 것이 ‘정종’의 유래이다. 스님 앞에 놓인 책은 ‘정종 조동종(正宗曹洞宗 원조 조동종파)’이라는 불교서적이었다.
일본어에는 외래어로 들어 온 ‘부스’라는 말이 있다. 뜻은 마땅하지 않다는 부정적 말이다. 현대 중국어의 ‘부스(不是 NO)’와 같다. 일본에서는 그 유래를 잘 모르고 쓰기도 하지만 본래 항구도시 나가사키(長崎)에서 전래되었다고 한다. 나가사키에 드나드는 중국의 선원들이 현지 일본인과 교류시 마땅하지 않은 것에는 “부스” “부스” 했던 중국어를 일본어에 그대로 들어 와 지금의 형태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도쿄의 우에노(上野)에 홍고(本鄕)라는 지명이 있다. 도쿄대학이 소재하는 학문의 중심지이다. 그 유래가 중국과 관련이 깊다. 이곳의 지명은 ‘창평향(昌平鄕)’이었고 홍고는 창평향의 중심거리였다. 창평향은 중국 산동성 공자가 태어 난 곳으로 곡부(曲阜)의 한 지역이다. 중국의 창평향이 도쿄에 나타난 것이다. 일본 유학의 대가 하야시 라잔(林羅山)은 이곳에 공자를 모시고 이름도 공자의 고향 창평향을 그대로 따왔던 것이다.
황금과 옥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한중일 삼국은 황금보다 옥을 귀하게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태양의 빛깔이 황금색이라 생각하였다. 이집트의 왕인 파라오가 죽으면 태양의 빛깔인 황금 마스크를 씌워 사후 승천하도록 기원했다. 이집트의 황금 숭배 사상이 그리스에서 유럽으로 옮아갔다.
그리스 신화에 미다스 왕은 만지는 것이 모두 황금이 된다. 황금이 얼마나 좋으면 이러한 신화가 나왔을까 싶다. 그리스에서 전래된 황금이 귀하게 되니 스키타이 등 기마민족이 황금을 몸에 지니게 되었다. 기마민족 만주족이 세운 후금(淸)의 초대 황제 누루하치의 본래 뜻은 황금이다. 청조가 망하고 민국시대에 청조의 누루하치 집안은 한자 성 김(金)씨로 바꾸었다. 기마민족의 후예인 신라의 왕족 김(金)씨의 성도 황금과 관련 된다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기억난다. 신라의 수도 경주의 고분에서 황금관이 많이 출토된 것도 기마민족의 황금숭배의 일환이라는 설명이다.

황금의 문화와 옥(玉)의 문화
중국에서는 태양의 색을 백색으로 보았다. 한자의 백(白)이라는 글자는 태양(日)에 비스듬한 햇살이 붙어 만들어 진 글자이다. 중국 태극의 음양(陰陽 낮과 밤)은 흑백이다. 중국에서는 태양이 비추는 낮은 흰색이요 밤은 검은색으로 보았다.
한중일 3국의 보물은 역시 옥이다. 완벽(完璧)이라는 글자가 옥의 온전함을 이야기 하듯 중국이나 한국의 왕이 쓰는 면류관은 옥관이다. 옥이 달린 12줄은 황제의 옥관(帝冠)을 의미하고 9줄은 제후 즉 옥관(王冠)으로 구분한다. 황제는 만세라고 부르는 왕은 천세로 구분하는 것과 같다.
일본에서 황금은 보물 보다는 장식용으로 사용되었다. 일본에서는 얇은 종이처럼 잘 늘어나는 황금의 성질을 이용하여 황금 종이로 집의 외벽을 장식했다. 교토의 금각사는 황금 종이로 입힌 건물로 오후가 되면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신다.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일본을 찾아 온 송나라 무역상들은 일본은 황금으로 집을 지을 정도의 황금이 풍부한 나라라고 알고 있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는 항저우(杭州)에서 만난 송나라 무역상으로부터 일본에는 황금이 돌처럼 굴러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대로 견문록에 기록해 두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을 탐독한 콜럼버스가 배를 띄운 것은 황금의 나라 일본을 가기위해서였다.
일본은 황금을 중요시하지 않고 옥을 중시했다는 것은 일본 천황이 귀하게 여기는 3종의 신기(神器)에 황금은 없고 옥이 맨 먼저 나온다. 옥(曲玉)은 재력(富)을 상징한다. 다음으로 지식을 상징하는 거울(鏡), 그리고 공권력을 상징하는 칼(劍)이 천황의 3종 신기이다.

중국과 한국에서의 피휘 사상
중국의 황제나 성인(聖人) 공자의 이름(휘 諱)을 기피하는 피휘(避諱)제도가 한국에는 그대로 이어져 왔지만 일본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 중국과 강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어 한반도의 여러 왕조들은 중국문화의 입김을 직접 받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은 바다로 떨어져 있어 자신의 뜻으로 문을 닫거나 열수는 있어도 한반도는 그렇지 못했다.
불교의 관세음보살이 당 태종 이세민의 이름을 피해 세(世)가 빠지면서 관음보살이 된다. 큰 언덕이라는 대구(大丘)가 공자의 이름자인 구(丘)를 피해 대구(大邱)가 된 것도 같은 이유다. 한반도에서 중국에 따라 경명(敬名)사상으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자(字)나 호(號)를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 왕조 임금들의 이름에 어려운 글자가 쓰이거나 외자가 사용된 것은 피휘 제도를 고려 백성들이 이름 짓는 데 불편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라는 이야기가 있다.
반면에 일본은 조상이나 존경하는 사람의 이름자를 자신의 이름 속에 넣는 풍습이 있다. 아베신조(安倍晉三) 일본 총리의 이름자에는 그의 고향 야마쿠치(山口)의 위인(偉人)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晉作)의 이름자(晉)가 들어 있다.

한자를 통해 본 고대 중국의 인문지리
한자(漢字)의 발상지가 중국이므로 한자를 통해 과거 중국의 인문지리 상황을 알 수 있다. 동쪽의 동(東)을 자세히 보면 나무(木)에 태양(日)이 걸린 모습이다. 이는 고대 중국은 지금과 달리 숲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인은 아침이 되면 숲속에서 떠 오른 태양을 기억하고 있다. 숲이 많은 고대 중국에는 아프리카처럼 코끼리(象)도 많았던 것 같다. 한자 상(象)은 코끼리 모습이다.
그런데 지금은 황토 고원을 위시해서 대지가 벌거숭이로 남아 있다. 그 많은 수림이 어디로 갔을까. 고대 중국인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엄청난 크기의 청동제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청동제기는 광물을 녹여 청동을 뽑아내어 만든다. 많은 나무를 잘라서 화목(火木)으로 써야했다. 나무는 자르지만 심지를 않았다. 수림과 함께 코끼리도 사라졌다.
불교의 사찰에는 어미에 반드시 ‘사(寺)’를 부친다. ‘사’를 종교시설로 보지만 본래는 한(漢)나라 시대는 정부의 관청을 의미하는 는 접미사였다. 후한시대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소개될 때 인도의 스님이 백마에 불경을 싣고 왔다고 한다. 한나라는 불교의 사절을 예우하기 위해 정부의 관청으로 외빈 숙소인 홍로사(鴻?寺)에 스님 일행을 모셨다.
관청을 의미하는 사의 권위가 좋아서일까. 외래 종교로서 관청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싶어서일까. 그 후 불교의 사찰에는 반드시 ‘사’를 붙여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생존에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한국과 일본은 연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불교 전래와 함께 그대로 쓰고 있다.
국(國)이란 글자를 자세히 보자. 네모(?)안에 혹(或)이 들어있다.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혹(或)자는 혹(惑)처럼 항상 뭔가 잘 못되고 있는 분위기다. 본래 국가라는 의미로 방(邦)을 썼는데 한(漢)고조 유방(劉邦)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 국(國)자를 만들어 썼다고 한다. 이 글자를 분해해 보면 고대 중국인의 의식을 알 수 있다. 네모(?)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 라는 사상에 따라 국가를 의미한다. 네모 속에 사람(백성)의 입(口)이 있다. 입(백성)을 무기(戈)로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다. 영토 백성 그리고 주권을 지키는 국방력 등 국가의 구성요소가 글자 한 자에 다 들어 있다.
그런데 만들고 나서 보니 국가 안에 항상 미혹(迷惑)이 붙어 있는 모습이 된다. 2000년 전 당(唐)의 무측천(武則天)이 주(周)라는 나라를 세워 중국 최초의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되었다. 여황제는 마음에 들지 않은 글자를 임의대로 바꾸었다. 그 중에 국(國)자가 들어 있다. 무측천의 생각으로는 나라는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야 하는데 나라 속에 ‘미혹’이 들어 있어 발전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무측천은 네모(?) 속에 ‘팔방(八方)’을 넣어 새로운 ‘국(?+ 八方)’자를 만들었다. 그것이 20 년간 쓰이다가 무측천이 죽고 주(周)가 멸망하자 무측천이 만든 모든 글자가 자동 폐기된다. 중국과 멀리 떨어져 무측천의 주(周)가 망한 것을 몰랐던 일본의 일부 지방에서는 지금도 이름 등에서 무측천의 ‘국(?+八方)’자를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국회 배지에는 한 때 국회라는 국(國)자가 들어 있었다. 무궁화와 연결시키다 보니 무궁화 속에 혹(或)이 들어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2000년 전 무측천이 우려했던 ‘국’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회가 생산적이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 발전에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이 국가를 미혹하게 만든다는 글자가 배지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국회 배지에 ‘국회’라는 한글 두 글자를 넣은 새로운 배지를 사용하고 있다.

한.중.일의 한자 조어(造語)
우리가 흔히 쓰는 한자 단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만든 것이 많다. 한자는 본래 중국 것이지만 그 글자를 이용하여 근세에 도입된 서양의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한자 번역어를 만들었다. 한중일 3국에서 서양문화에 대대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 일본의 학자들이 번역의 필요에서 만든 조어가 많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신문 지상에 오르는 한자 단어의 70%이상이 메이지 유신 후 일본의 학자들이 만든 글자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이나 중국은 일찌기 일본에 유학한 학자들에 의해 일본에서 만들어진 번역어를 역수입해 쓰고 있는 셈이다.
은행(銀行)이란 글자를 보자. 일본의 학자들은 동양권에는 없는 서양의 뱅크(bank)를 번역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래서 풀어서 뜻이 통하는 다른 언어를 만들었다. 당시 은본위제라 돈 즉 은(銀)을 사고파는 비즈니스(行)를 은행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은고(銀庫)라고 했다지만 고(庫)는 돈을 가두어 두는(stock) 현상만 생각했다. 은행은 돈의 흐름(flow)이 중요하므로 거래의 의미의 행(行)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글자를 ‘은행’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부 한자 언어는 중국에서 만든 것도 많다. 중국은 명말 마테오 리치 등 서양의 선교사가 들어 와서 당시 라틴어를 중국어로 번역하였다. 기하(幾何)는 라틴어의 ‘geo’를 발음대로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유럽을 의미하는 구라파(歐羅巴)도 중국어 발음대로 표기한 것으로 중국 발음으로 읽으면 ‘오우로파’가 된다. 마테오 리치가 만든 세계지도를 보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세계 지명이 당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사용되는 번역어의 유래가 중국제인지 일본제인지 한자어의 어순으로 알 수 있다. 중국어의 기본 문형은 영어처럼 ‘주어+ 동사+ 술어(목적어)’로 나열되고 일본어는 우리말처럼 ‘주어+ 술어+ 동사“ 순서가 된다. 한자어의 구성이 전자에 속할 경우 중국제 후자에 속할 경우 일본제(또는 한국제)로 볼 수 있다.
우리가 쓰는 금융(金融)은 일본제이다 돈(금)을 융통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중국식으로 융금(融金)이라는 말도 함께 쓴다. 중국식 표현이다.
우리나라에서 일본이 만들어 놓은 번역어를 그대로 쓰다 보니 웃지못할 일도 생긴다. 독일(獨逸)이나 낭만(浪漫)의 말은 일본인이 자신들의 발음에 맞는 한자를 찾아 사용한 글자이다. 한자는 발음부호로 글자에는 의미가 없다. 따라서 일본의 한자발음과 다른 발음을 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대로 쓰는 것은 맞지 않다. 독일로 쓰지 않고 ‘도이치’로, 낭만이라고 하지 않고 ‘로망’이라는 현지 음으로 발음하는 것이 옳다.

인문학의 힘으로 뉴 노말(新常態)을 맞이하자
한중일 3국의 역사적 사실 중에 데자뷰 즉 기시감(旣視感)을 느끼는 사실을 발견한다. 중국의 ‘정난의 변’은 명초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를 몰아내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는데 54년 후 조선 초기 수양대군이 이것을 벤치마킹하여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러한 삼촌과 조카의 권력투쟁은 7세기 중반 일본에서도 있었다. 일본에서는 임신(壬申)의 난이라고 부르는 텐무(天武)천황이 된 오오아마가 형님인 텐치(天智)천황의 아들 오오토모를 몰아내고 천황이 된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3자매 이야기는 300년 이상의 시공간의 역사를 사이에 두고 비슷하게 전개되어 관심을 끈다. 일본 희대의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여동생 오치치의 세 딸과 청말 찰리 송(宋)의 세 딸과 운명이 비슷하여 놀라게 된다.(졸고 ‘인문삼국지’의 ‘중국과 일본의 세자매’ 참조)
21세기 한중일 3국은 새로운 시대에 처했다. 이른바 ‘신창타이(新常態)’ ‘뉴 노말’의 시대가 도래했다. 우리들은 길 없는 길, 지도에 없는 길을 가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새로운 길을 찾아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 가야하는 우리들에게는 생각의 근육이 단련되어야 한다. 여기에 한중일 3국의 인문학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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