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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 엄마…에넹이 해냈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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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이었다. 1992년 파리의 롤랑가로스. 독일의 슈테피 그라프와 미국의 모니카 셀레스가 프랑스오픈 테니스대회 여자부 왕관을 걸고 싸웠다.

코트는 여름 햇살 아래 선홍빛으로 타올랐고, 스탠드는 관중으로 넘쳐났다. 그 한구석에서 가냘픈 체격의 열살배기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의 우상인 그라프의 한동작 한동작을 가슴에 새겼다. 11년 후 롤랑가로스의 여왕, 쥐스틴 에넹(21)이었다.

소녀 에넹은 다짐했다. "언젠가는 나도 이곳에 올 거야. 그리고 우승할 거야." 소녀 곁에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딸을 굽어보는 여인이 있었다.

프랑수아즈, 수년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난 그녀는 사랑하는 딸이 생애 최초의 그랜드 슬램 타이틀을 따내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에넹은 천국의 프랑수아즈를 느꼈고, 승리의 영광도 그녀에게 바쳤다.

세계랭킹 4위의 에넹은 8일(한국시간) 롤랑가로스에서 벨기에 선수와의 대결로 펼쳐진 프랑스오픈(총상금 1천4백21만달러) 여자 단식 결승에서 킴 클리스터스(세계 2위)를 세트스코어 2-0(6-0, 6-4)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에넹 자신은 물론 벨기에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를 제패한 것이다.

에넹은 "오늘 아침 잠에서 깼을 때 '엄마를 위해 반드시 이기자'고 다짐했다"고 말했다. 이 정신력이 가냘픈 체격(1m65㎝.57㎏)의 에넹에게 괴력을 불어넣었다.

에넹의 파워는 준결승 상대였던 세레나 윌리엄스(1m78㎝.65㎏)나 결승 상대인 클리스터스(1m74㎝.68㎏)를 압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에넹이 휘두르는 라켓은 외과의사의 메스처럼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결승답지 않은 67분간의 1인쇼. 에넹은 4게임만 내줬다. 88년 그라프가 나타샤 즈베레바(벨로루시)를 2-0(6-0, 6-0)으로 셧아웃시킨 이래 프랑스오픈 여자 결승 사상 최소 실점 기록이다.

에넹이 1세트를 29분 만에 6-0으로 끝내면서 승부는 기울었다. 클리스터스는 2세트 4-4까지 벼텼으나 잇따른 실수로 서비스 게임을 빼앗겨 38분 만에 두번째 세트까지 내줘야 했다.

에넹은 "클레이코트에서는 힘과 스피드가 능사는 아니다. 나는 체격이 작고 파워도 약하지만 다른 방식으로도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에넹은 벨기에 국왕 부처가 건네주는 트로피에 감격의 키스를 했고, 우승상금 95만8천달러도 손에 넣었다. 에넹의 세계랭킹은 비너스 윌리엄스를 제치고 3위로 올라서게 된다.

한편 남자 복식 결승에서는 미국의 쌍둥이 형제 밥-마이크 브라이언조가 예브게니 카펠리코프(러시아)-폴 하루이스(네덜란드)조를 2-0으로 꺾고 우승했다.

마이크는 하루 전 혼합복식 결승에서 리사 레이먼드(미국)와 짝을 이뤄 엘레나 리코브체바(러시아)-마헤시 부파티(인도)조를 2-0으로 제압, 2관왕이 됐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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