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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김훈 ‘강(江)의 노래’③ 두만강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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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25일 오전부터 6인승 승합차로 백두산을 올라갈 때 비가 내렸다. 자작나무 숲이 젖어서 향기가 대기에 낮게 깔렸다.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이 갈라지고 개벽하듯이 햇살이 내려왔다. 천지는 창세기의 호수처럼 시원(始原)의 힘을 품어냈고 젖은 봉우리들이 번쩍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안개가 몰려와서 천지를 뒤덮었다. 고은 시인이 손나팔을 입에 대고 “안개다! 안개다! 안개가 온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는 목청을 다해서 고함쳤다.

 백두산 정상이 안개에 덮이는 기상현상이 그 시인에게는 지체 없이 알려야 할 파천황의 긴급 중대사태인 것이었다. 그의 고함소리에는 주술적 신명이 담겨 있어서, 안개의 접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먼 지평선 쪽의 안개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안개다! 안개로구나!” 그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흐린 사진을 찍었다.

 호텔의 만찬 자리에서는 북한의 젊은 여성들이 봉사했고 식사 후에는 간단한 공연이 있었다. 호텔 정문 앞에는 인민공화국 깃발과 오성홍기가 교차로 세워져 있었다.

 호텔봉사원들은 미녀로 소문난 압록강 건너 강계 여성이라고 했다. 체구가 크지는 않았으나 목이 길고, 눈동자가 새카맣고 시선은 찌르는 듯했고, 눈썹은 짙었고, 긴 말총머리에 윤기가 흘렀다. 김동환(1901~미상)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의 여성 주인공 ‘순이’는 여진족의 후예 재가승(在家僧)의 딸인데, ‘머루알같이 까만 눈과 노루 눈썹 같은 빛나는 눈초리/게다가 웃을 때마다 방싯 열리는 입술’로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순이’를 떠올리며 젊은 여성봉사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다. 조국 산천의 마을마다 집집마다 별 같은 딸들이 자꾸자꾸 태어나기를 나는 바랐다. 여성봉사원들은 일하기 편하게 개량한 한복 차림에 인공기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단 여성도 있었고 오른쪽 가슴에 단 여성도 있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슴고기의 향기는 품격이 높아서 잘생긴 짐승의 이미지와 같았다. 개고기는 메뉴에 없었지만 손님이 부탁하면 무침으로 가져다주었다. 양념이 진하지 않아 개의 육질이 직접 전해져 왔다. 산이 깊어서 그럴 테지만 나물이나 야채요리는 단연코 뛰어났다. 무와 배추는 섬유질이 억세고 물이 많아서 씹으면 와삭거리면서 상서로운 액즙이 입안에 가득 찬다. 김치는 소금이나 젓갈에 과도하게 절여지지 않아서 고랭지의 서늘한 기운이 살아 있었고 그 국물은 고지의 겨울바람처럼 청량했다. 이 날카로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목구멍에서 창자 쪽으로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나는 김칫국물에 흰쌀밥을 비벼 먹었다. 나물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도 많았는데 모두 다 들이나 산의 흙 냄새·물 냄새, 햇볕의 강도, 계절의 촉감을 지니고 있었고 나물마다 그 서식지의 질감을 사람의 몸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해물은 말린 멸치나 대구포 정도였지만 생선요리의 핵심부는 강에서 잡아온 민물고기였다. 재료에 토막을 치지 않고 통째로 찜으로 내놓았다. 압록강·두만강과 그 샛강들의 격류를 오르내리며 살아온 민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했고 부위마다 맛이 달랐는데, 살아서 고생을 많이 했을 배지느러미나 꼬리지느러미 언저리에 붙은 살이 향기로웠고 씹기에 알맞은 저항감이 있었다.

 국토의 관능은 모든 아름다운 얼굴들 위에, 모든 산과 강과 바다에, 그리고 모든 나물과 무·배추·물고기 속에 살아 있었는데, 이 관능을 공감함으로써 화해를 이루자는 주장은 통일의 전략이 될 수 없는 것인지, 나는 답답했다. 나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에 자리 잡는 평화를 생각했다. 토론으로 뜨거운 버스 안에서 나는 숙박지의 저녁밥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두만강 하구까지는 험준한 산악도로를 따라서 달렸다. 도로는 두만강 변으로 바싹 접근했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거듭했다. 강 건너 쪽에서 농부가 강가에 소를 몰고 와서 물을 끼얹어 주고 있었다. 소는 쟁기와 멍에가 풀어져 있었다. 일을 시키다가 소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더위를 식혀 주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줍는지 아이들이 강가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사내들이 시멘트 반죽을 흙손으로 발라서 단층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뒤로 비탈밭은 가팔라서 소달구지가 올라갈 수 없을 듯싶었다. 어느 마을에나 상업간판이 하나도 없어서 생업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날이 어두워도 집들은 불을 켜지 않았다.

 북·중 사이의 두만강 국경은 한반도의 DMZ처럼 삼엄하지는 않지만 월경이탈자를 막기 위해 철조망이 처져 있고 북한군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버스가 강에 바싹 접근할 때 건너편 초병이 한 명 보였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에 소총이 힘겨워 보였다. 나이가 몇인지, 군대 생활은 견딜 만한지, 구타나 따돌림은 없는지, 고위 간부들이 군수품을 빼먹지는 않는지, 방산비리는 없는지, 겨울에 보초 설 때 발은 시리지 않은지, 고향이 어딘지, 제대는 얼마 남았는지, 형제는 몇인지, 장래희망은 무언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남쪽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될 말이 아니었다. 아마 그 젊은이는 스물네댓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 나이 또래의 남쪽 젊은이들의 적(敵)이며 젊은이·늙은이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적이라는 것은 난해했다. 이 젊은이들이 또다시 어느 고지 어느 참호에서 마주치면 서로 쏘고 질러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미래의 세대에게 전승시키고 있다. 나는 ‘통일’보다도 우선 강 건너편에서 보초 서고 있는 그 북한군 병사의 생애 속에서 인간다운 가치와 소망들이 온전히 구현되기를 바랐다. 생명을 서로 긍정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의 평화는 불가능할 것인지를 나는 강가에서 생각했다.

 두만강은 해란강과 훈춘강을 합치면서부터는 북북동에서 남남동으로 진로를 바꾼다. 협곡구간을 빠져나온 강물은 드넓은 초원과 습지를 굽이치면서 강의 커다란 자유를 보인다. 두만강은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아서 그 하구까지도 신생(新生)의 표정으로 빛난다. 동해에서 아침 해가 뜰 때, 두만강 물줄기에 햇빛이 닿으며 강물을 따라서 먼 산골까지 아침의 노을이 퍼진다고 하는데, 이번에 보지는 못했다. 이 하구에서 한반도와 러시아, 중국의 국경이 마주친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금 위로 풀들이 우거지고 강물이 흘렀다. 여기가 조선 후기 이래로 두만강 너머로 쫓겨가고 숨어들고 벌어먹으러 가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들판이다. 강물에는 인간의 고난과 설움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강은 저 혼자 자유롭고 아름다워서, 시인 이용악(李庸岳·1914~71)은 두만강을 ‘천치(天癡)의 강’이라고 불렀다. 이 강가에서 지금 중국 공안들이 월경한 북한 사람들을 잡으려고 풀섶을 뒤지고 있다. 두만강 하구에서 디아스포라는 진행 중이다. 두만강 초소에서 보았던 북한군 병사의 이름을 모르는 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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