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것도 잃을 게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쓰게 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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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호 14면

마르그리트 뒤라스(Marguerite Duras·1914~1996)를 유명하게 만든 공쿠르 상 수상작 『연인』(1984)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이상용의 작가의 탄생 <15>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이게 다예요』

“전쟁이 끝나고 몇 해가 흘렀다. 몇 번의 결혼과 몇 번의 이혼에서 아이들을 낳고 몇 권의 책을 펴냈을 즈음이었다. 그가 부인과 함께 파리에 왔다. 그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요. 그녀는 목소리에서 이미 그인 줄 알았다. (…) 그는 겁을 먹고 있었다. 예전처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리는 음성 속에서, 갑자기, 그녀는 잊고 있던 중국 억양을 기억해 냈다. (…) 그는 잠깐 뜸을 들인 후 이렇게 말했다. 그의 사랑은 예전과 똑같다고. 아직도 그녀를 사랑하고 있으며, 결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을 거라고. 죽는 순간까지 그녀만을 사랑할 거라고.”

『연인』은 1930년대 베트남을 배경으로 ‘열다섯 반’ 나이의 가난한 프랑스 소녀와 30대 후반의 부유한 중국인이 일 년 반에 걸쳐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다. 뒤라스의 체험이 녹아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뒤라스는 1914년 베트남 호치민에서 태어났다. 수학 교수였던 아버지가 풍토병에 걸려 요양차 프랑스로 떠났는데 가족을 다시 만나지 못하고 눈을 감았고,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베트남에서 17살까지 살았다. 이때의 기억들은 『연인』뿐 아니라 뒤라스의 작품 곳곳에 펼쳐져 있다. 아버지가 프랑스로 간 후 가정은 어머니를 중심으로 미움과 폭력이 교차하는 공간이 되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닌 음습함은 대부분 작가 자신이 창조한 작품들을 통해 전해진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1950), 『숲 속의 나날들』(1976), 『연인』(1984), 『북중국의 연인』(1991) 등을 꼽을 수가 있다. 작품의 연대기를 보면 평생에 걸쳐 어린 시절의 기억은 다양한 형태로 쓰였다.

뒤라스가 겪은 고독은 글쓰기에 담겨 있다. “나는 초기 작품들에 나타나는 그런 고독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가지고 다녔다. 어디에 가든 항상 내 글쓰기는 나를 따라다녔다. 파리에서도, 프랑스의 트루빌에서도, 뉴욕에서도.”

알랭 레네 감독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1960) 포스터

글쓰기로 승화된 고독, 문학과 영화를 넘나들다
뒤라스는 같은 기억을 다양하게 쓰는 사람이다. 문학과 영화를 오가며 매체를 바꾸기도 하고, 기억의 실타래를 조금씩 빼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 기억은 영화의 세계로 옮겨지기도 했다. 칸 영화제에 상영되어 예술 및 비평 부문을 수상한 ‘인디아 송’(1975)은 베트남의 기억을 콜카타로 옮겨 놓은 결과물이자 뒤라스가 성취한 영화적 시도였다.

“어머니는 코친차이나의 빈롱에서 지역민을 가르치는 학교 교사였어요. 어느 날, 행정관이 다른 임지로 발령을 받아 떠나갔어요. 그리고 새 행정관이 라오스에서 부인과 두 딸을 데리고 도착했지요. 처음으로 그 부인이 내 소설에 등장한 것은 내가 40세였던 1964년에 쓴 소설 『롤 발레리 스탱의 황홀』이에요. 그녀는 65년작 『부영사』에서 안 마리 스트레테르라는 이름으로 등장해요. 그녀는 75년 영화 ‘인디아 송’에 다시 등장하게 돼요. (…) 나는 영화를 찍으면서 그녀의 생애를 재설정했어요. 빈롱을 인도의 콜카타로 설정했죠.”

60년 알랭 레네가 연출한 ‘히로시마 내 사랑’의 시나리오를 집필할 무렵, 뒤라스는 연극과 영화의 세계에 몸을 담근 상태였다. 자신이 직접 연출한 작품과 대본을 쓴 작품은 60년 이후 뒤라스 작품 세계의 한 축을 이룬다. 그러나 뒤라스의 글과 영화는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기억을 탐색하듯 흘러가는 영상이나 느릿느릿 전개되는 시적 문장들은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쳤던 60년대와 70년대 뒤라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뒤라스의 공쿠르상 수상작 『연인』의 표지

38세 연하의 연인이 받아 쓴『연인』
‘인디아 송’을 선보이던 때는 뒤라스의 유명세가 절정에 이른 시기였다. 75년 노르망디 지역에 있는 캉(caen)의 뤽스 극장에서 ‘인디아 송’이 상영됐다. 그곳에 사는 젊은 남자가 뒤라스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요즘 한국 극장가에서 이뤄지는 시네마 토크는 60~70년대 프랑스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행사였다. 젊은 남자는 영화를 보고 열광했으며, 뒤라스의 책에 사인과 함께 주소를 받았다. 그 후 남자는 뒤라스에게 시도 때도 없이 편지를 보냈고, 트루빌에 있던 뒤라스로부터 80년 7월에 오라는 연락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함께 살게 된다. 그는 뒤라스의 마지막 연인 얀 앙드레아였다.

80년 7월 당시 뒤라스는 66세였고, 얀은 28세였다. 얀은 자기 책에서 그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80년 9월 ‘리베라시옹’에 기고한 주간 칼럼을 에디시옹 드 미뉘에서 책으로 묶어 출판했지요. 책 제목은 『1980년 여름』이었습니다. 이 책은 나에게 헌정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얀 앙드레아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뒤라스의 임종을 지켰다. 『연인』은 뒤라스가 구술한 내용을 얀이 타이핑으로 완성한 것으로, 그는 그녀 사후 『이런 사랑』이라는 책을 통해 뒤라스와의 기억을 정리하기도 했다. 뒤라스 또한 그와의 사랑을 다양한 방식으로 남겼다. 92년 발표한 『얀 앙드레아 스테네르』를 통해 자신의 젊은 연인을 소설의 본격적인 주인공으로 삼았으며, 마지막 작품인 『이게 다예요』를 통해 두 사람의 대화와 기억의 편린들을 마지막 책으로 갈무리해 내놓았다.

뒤라스는 복잡한 작가다. 하나의 기억을 반복적으로, 조금씩, 다양한 형태의 글 위에 풀어 놓는다. 그러나 기억을 탐구하는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뒤라스는 항상 출발로 돌아간다. 『이게 다예요』에서 인상 깊은 대목 중 하나는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책은 뭐죠?”라는 얀의 질문에 대해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라고 답하는 장면이다. 자신의 베트남 체험을 본격적으로 다룬 이 장편 소설은 그녀가 처음으로 글쓰기를 통해 과거와 대면한 순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작품들의 무수한 원천이 된다. 뒤라스는 말한다.

“가진 것을 모두 잃고, 쓸 것이 아무것도 없고,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을 때 우리는 글을 쓰게 된다”고. 뒤라스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을 때 쓴 글은 놀랍게도 육체의 죽음을 넘어 오래도록 살아 있는 또 하나의 유전자로 인간 사이에 남겨지고 기억된다는 것을. ●

이상용 영화평론가. KBS ‘즐거운 책 읽기’ 등에서 방송 활동을 하고, CGV무비꼴라쥬에서 ‘씨네샹떼’ 강의를 진행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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