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북한 그림 모르면 우리 畵壇은 반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아무리 분단된 상황이라도 '우리 것'을 얘기 할 땐 남과 북을 모두 아울러야 온전하지 않겠습니까. "

미국 워싱턴에서 화랑 '새스코(SASCO)'를 운영하며 미국 조선미술협회를 이끌고 있는 신동훈(申東勳.55)회장. 그가 북한 미술에 매달리는 이유는 이렇듯 간단하다. 그림이란 끈 하나만을 가지고 분단된 마음이나마 하나로 얽어보겠노라고 남북을 쉴새없이 오가는 그가 북한 화가의 개인전을 열어볼까 해서 서울에 왔다. 그는 분명 정열의 사나이다. 우리는 북쪽에 대해 잘 모른다. 그건 미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신회장이 뛰어다니는 이유이자 그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에 대한 답이다.

"남쪽에 훌륭한 화가가 많이 있듯이 북쪽에도 엄청난 화가가 많이 있습니다. 또한 그들도 우리네와 같은 정서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예술에 대한 치열함은 남쪽보다 나으면 나았지 조금도 뒤지지 않습니다."

신회장이 북한 미술에 대해 얘기할 때 입버릇처럼 모두(冒頭)에 붙이는 말이다. 어린애 대하듯 한 투지만 체제에 따른 선입견을 지우라는 고수의 주문이자 훈수다. 사실 북한측 관계자들을 제외하곤 북한 미술, 그중에서도 특히 '조선화(朝鮮畵)'에 관한 한 그만한 고수가 없다.

전문가라고 해봐야 올 초 그가 펴내기 전까지는 변변한 도록조차 구경하지 못한 형편이었으니, 비록 원래 미술 전공은 아닐지라도 북한을 드나들며 발로 뛰어 체득한 그의 식견을 당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그가 이렇게 되기까지는 만만찮은 시련의 세월을 견디고 엄청난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다.

1975년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으로 이민을 간 그가 그림과 인연을 맺은 건 1988년. 생선 다듬기.페인트 칠하기 등 허드렛일 3년 만에 식당을 차렸고, 여기에서 10년간 번 돈을 털어 화랑을 시작한 것.

"어려서부터 막연히 그림이 좋아 시작한 건데 뭘 알아야 하죠. 어차피 한국인으로선 우리 그림밖에 다룰 게 없었는데 가만히 보니 반쪽이더라 말입니다. 그래서 이왕 공부할 거 나머지 반쪽을 내가 채우자 하고 무턱대고 달려들었습니다."

베이징을 근거지로 삼아 옌볜.선양 등 북한 그림과 정보가 있을 만한 곳은 죄다 누비고 다녔지만 사기만 당하길 반년-. 이제 남은 건 평양으로 직접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막상 평양에 들어가서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디 가서 누구를 만나야 할지….

"요령이 없을 땐 무식한 게 최고 아닙니까. 막무가내로 1년을 돌아 치고 나니 알음알음으로 인맥도 형성되고, 조선화에 대한 이해와 안목도 생겨납디다."

그가 조선화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 89년 3월 북한의 문을 처음 두드린 이래 지금까지 모두 20여차례에 걸쳐 북한을 다녀왔다. 지난해만 네차례 다녀왔고 올해 들어서도 지난 3월 8일부터 보름간 평양에 체류했다.

그가 지금까지 방북해 만나온 사람들은 북한 화단의 최고봉들을 포함해 줄잡아 50여명. 특히 전북 전주 출신으로 조선화의 전 장르에 걸쳐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 거장 효원 정창모(72.인민예술가)화백을 비롯, 현재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중인 작품 '금강산'이 한때 5원짜리 지폐에 실릴 정도로 북한이 자랑하는 국보급 화가인 금강범 정영만(인민예술가 겸 노력영웅.99년 61세로 사망), 평양미술대 교수로 있으면서 독특한 선묘화법으로 새 화풍을 진작시킨 화봉 황영준(지난해 83세로 사망.공훈예술가), 세화(細畵)기법으로 풍경화와 동물화 등에 능한 산율 선우영(56.인민예술가), 운보 김기창 화백의 동생으로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낸 김기만(74.공훈예술가),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현재 원로화가들의 모임인 송화미술원 원장인 근암 김상직(69), 평양미술대 출신으로 화조화에 뛰어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만수대창작사의 조선화창작단장을 맡고 있는 오영성(39.공훈예술가) 등과는 깊은 교분을 쌓아왔다.

신회장이 이들에게서 수집하거나 전시를 위탁받은 명작 진품만 1백여점. 이를 바탕으로 90년부터 매년 미국 내 순회(워싱턴.뉴욕.시카고.LA 등)전시를 해오고 있고, 98년 도쿄에 이어 99년 2월과 올 1월엔 서울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가는 곳마다 호평 속에 성황을 이뤘다.

그는 "조선화가 우리 고유의 필법과 진채(眞彩)를 사용해 우리 정서와 배치되지 않으면서도 강렬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이라며 "여세를 몰아 올해 안에 서울을 시작으로 최고의 조선화가들 위주로 개인전도 열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