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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함양박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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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함양박씨의 시조는 신라 경명왕의 세째 아들인 박언신 (속함대군)이다. 그러나 그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중엽 예부상서를 지낸 박선(1세)을 중시조로 삼고 세계를 잇고있다. 속함은 함양의 옛이름. 이때문에 「함양」을 본관으로 했다.
박선이후 함양박씨는 박인정 (의종) , 박신청 (명종) , 박윤정 (동) 등 3대에 걸쳐 예부상서를 배출, 고려의 명문으로 성장했다.
박신유는 고종24년 김경손과 함께 이연년의 난을 평정한 무장.
이부상서·추밀원사등을 거쳐 응천군에 봉해졌다. 박지문 (검교군기소감) 박지빈 (위위윤), 박지량 (판삼사사), 박지수 (밀직부사), 박지온 (감찰어사), 박지영 (중랑장) 등 6형제는 박신유의 아들들. 이때부터 함양박씨는 「육지파」로 분류된다.

<3대가 예부상서>
14세기말 고려는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당했다. 이시기에 「함양박문」은 유능한 무장을 배출, 왜구와의 전장에서 공을 세웠다.
박지량은 대표적인 무장의 한사람. 그는 충렬왕1년 고려와 원나라의 연합군이 일본을 정벌할때 고려군 도독사 김방경 휘하의 중군법마사로 출전, 대마도의 일본군을 무찌른 공으로 원으로부터 무덕장군의 벼슬을 받았다. 뒷날 1품직인 판삼사사에 올랐다.
화왕2년 도원수가 되어 충청지방해안을 침입한 왜구를 토벌했던 박인계도 빼놓을수 없는 인물이다.
박안은 1389년 (창왕1년) 원수로서 박위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 적선 3백여척을 불사르고 그곳에 억류되어있던 고려인 포로 1백여명을 귀국시켰다. 조선개국후 좌군도총제로서 전라-충청-경기도 수군도체찰사를 역임했다. 그의 아들 박실은 예조참의·공조판서등을 거쳐 세종때는 도총제를 지낸 문무겸비의 명신이었다.
박성양 또한 세종때 대마도정벌의 명장이었던 이종무와 함께 왜구를 격퇴하고 도총부부총관에 오른 무관이다.
이밖에 고려의 인물로는 박장 (군부총랑) 과 박충좌 (판삼사사) 부자, 박원렴 (호부상서), 박지량 (판삼사사), 박언 (상동) , 박광실 (대제학) , 박리 (찬성사)등이 있다.
이들중 박충좌는 우역동과 쌍벽을 이루였던 역학의 대가였다.
함양박씨는 조선에서 총69명의 문과급제자를 냈다. 박씨중에서는 밀양박·반남박씨에 이어 랭킹3위.
박초는 조선초의 대표적 얼굴이다. 그는 고려말 국교인 불교를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정계를 들끓게했던 장본인으로 조선개국후에 이조판서·대제학등을 지냈다. 세종때는 조정에서 여진족의 침범을 피하기위해 경원부를 남쪽 용성으로 옮기려하자 이를 적극반대, 국토가 좁아드는 것을 막았다.

<옥사에 연루 사사>
세종때 병조판서였던 박습은「강상인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사되었다. 이 옥사는 당시 병조참판이었던 강상인이 병무를 보면서 상왕인 태종에게 보고하지 않고 처리해 태종의 비위를 건드리는 바람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군부를 장악해야만 왕권의 유지가 가능했기 때문이었을까. 당시 태종은 병조판서 박습을 비롯, 강상인· 심온등 많은 신하를 처단했다.
이때 된서리를 맞은 함양박씨는 감시 내리막길울 걷다가 선조때대사헌·형조·이조·호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오른 박대립을 내면서 다시 증앙관계에 진츨했다.
증종때 명필 박세영(돈영부정)은 그의 아버지요, 『동몽선습』의 저자 박세무는 그의 중부다. 그의 계부 박세사은 예조·호조·이조참의를 지냈다.
함양박씨는 조선중기의 인재로「향오인· 경팔입」을 자랑한다.「향오인」은 박충좌(고려·판상사사)의 후손 눌(찰방)의 다섯아둘인 거린(장렴)·형인(이조참의)·홍린 (대사헌)·붕인 (한임사서)·종인(이조정탕)등 5형제를말하고, 「경팔립」은 박세영의 네아들 대립 (좌찬성)·사립· 희입(전한)·춘입과 박세무의 두아들 소립(지중추)응립(군수)및 박세웅의 두아들 정입 (목사)·명입(판관) 등울 말한다.
사촌이내의 인척간인 이들은 거의 동시(중종∼선조)에 문과에급제, 앞서거니 뒤서거니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함양박씨는 또 세조∼숙종대에5명 (박용· 박이양· 박숙추· 박정설·박내정)의 호조참판과 4뎡(박계율· 박권· 박린· 박민헌) 의대사헌을 내기도 했다. 이둘중 박민헌은 호당에 뽐혔던 수재로 명종때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대사헌에 울랐으며 청백리로 이름을 남겼다. 일제하의 독립운동가요, 무정부주의자였먼 박열도 돋보이는 얼굴이다.1923년 일본천황 히로히또 (유인) 를 살해하려다가 거사직전에 체포된 그는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해방이 될때까지 22년2개월간의 옥고를 치렀다. 6·25사변때 남북되었다.
함양박씨는 해방후 사회각계에 탄탄한 인맥을 형성하고있다.

<각계에 탄탄한인맥>
박정근 (서울고법원장)박재섭(법박· 전고대법대학장) 박인희 (문철박· 재미교수) 박영식 (광주고법부장판사) 박보희 (종교인· 미워싱턴타임즈발행인) 박세경 (변호사·전민의원) 박성의 (문박· 전고대교수) 박철 (8代국회의원) 박찬 (변호사· 전국회의원) 박찬일(변호사·전광주변협회장) 박규태 (공박· 연대교수) 박광의(농박· 서울대교수)씨등 인재를 냈다.

<지명인사>
(대종회제공 무순)
▲박충식(전국회의원·작고)▲박학재(대학교수)▲박영종(전국회의원·작고)▲박승규(전국회의원·작고)▲박경식(이사관)▲박경종(아동문학가)▲박금철(공박·대학교수)▲박기운(서예가)▲박기환(서예가)▲박남순(전행정관리관·대종회장)▲박남희(지방체신청장)▲박노학(연구관)▲박노성(의박)▲박돈식(변호사)▲박희순(실업가)▲박동균(예비역육군소장)▲박동길(대학교수)▲박동선(전지방철도청장)▲박동수(한학자)▲박동엽(실업가)▲박두희(실업가)▲박명진(실업가)▲박범호(대학교수)▲박세영(변호사)▲박석환(강동세무서장)▲박성일(한의사)▲박승언(의박)▲박영석(실업가)▲박영석(광주종친회장)▲박영수(육군대령)▲박영준(대학교수)▲박영호(전경무관)▲박용전(전도경국장)▲박용진(공박·대학교수)▲박윤식(의박)▲박윤중(교육가)▲박인희(실업가)▲박일재(변호사)▲박일환(판사)▲박재승(변호사)▲박재룡(전이사관)▲박재욱(육영사업가)▲박재을(실업가)▲박재휘(교육가)▲박전식(육군대령)▲박종근(서예가)▲박종화(전이사관)▲박준희(문박·대학교수)▲박춘식(전북종친회장·실업가)▲박찬희(전이사관)▲박한기(실업가)▲박해준(이사관)▲박흥국(사회사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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