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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과 성산별곡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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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空山)에 쌓인 잎을 삭풍이 거두어 불어
떼구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니
천공(天公)이 일을 즐겨 옥으로 꽃을 지어
만수천림(萬樹千林)을 잘도 꾸며냈구나‘

송강 정철이 정쟁에 휘말려 고향(담양군 청평면 지곡리)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성산(星山)기슭과 송강(松江)강변의 사계절 자연의 아름다움을 읊은 성산별곡의 일부이다. 성산별곡의 한글 병풍이 박근혜 대통령과 아베(安倍晉三) 총리가 교차 참석한 6월22일 서울과 도쿄의 한일국교정상화50주년 기념행사장에 나타나 화제가 되고 있다.
1965년 6월22일 한국은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외교권을 상실한 이후 60년 만에 일본과 외교관계를 회복하는 한일기본조약에 서명을 하였다. 장소는 사토 에이사쿠(佐藤英作) 당시총리의 공관이었다. 그 후 한일기본조약은 양국 국회의 동의를 얻어 1965년 12월18일 서울에서 비준서를 교환하면서 발효된다. 비준서 교환 당시 사진을 보면 한글 서예가 갈물 이철경 여사의 성산별곡 12폭 병풍이 배경으로 보인다.
비준서 교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던 이후락 대사가 1970년 1월, 3대 주일 대사로 부임하면서 병풍의 전반 6폭은 도쿄로 가지고 가고 후반 6폭을 한일우호의 증표로 주한 일본대사관 가네야마 마사히데(金山正英)대사에게 기증하였다. 이번에 서울행사에 사용된 병풍 뒷면에 ‘한일협정 비준서 교환식 기념품 이후락 증 1970. 1.26’ 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락 대사가 가지고 간 전반부 6폭도 이번 도쿄행사에서 사용되었다. 한일 우호의 상징으로 서울과 도쿄에서 성산별곡의 12폭 전체 병풍이 나란히 등장한 것이다.
한일기본조약이 발효됨에 따라 한국은 1965년 12월 주일대표부 공사로 근무 중인 김동조 대사를 초대 대사로 임명하였고 일본의 경우 1966년 3월에 기무라 시로시치(木村四郞七)대사가 초대 대사로 부임하였다.
지난 50년 한일관계는 ‘시지푸스의 바위’처럼 위로 끌어 올리면 다시 굴러 내려가 처음부터 다시 올려야 하는 좌절을 겪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중단 없이 발전을 이어 왔다. 삭풍이 몰아치는 겨울이다가도 다시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는 자연의 이치처럼 한일관계에서도 냉온탕이 계속되어 온 것이다.
지난 2012년 말 아베정권이 들어서고 2013년 2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하였으나 그 후 2년 반 이상 두 나라는 정상회담 없는 비정상이 계속되고 있다. 한일관계는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까지 받아 왔다. 마침내 국교정상화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삭풍에다 눈까지 몰아오는’ 추운 겨울 한 가운데서 봄의 기운을 느끼게 하는 훈훈한 행사가 있었다.
6월22일 저녁 동 시간대에 도쿄의 쉐라톤 미야코호텔과 서울의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기념행사’가 열렸다. 도쿄에서는 한국의 국악이 연주되고 서울에서는 한일어린이합창단이 ‘고향의 봄’ ‘후루사토(고향)’등을 불러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서울에서는 벳소 고로 주한 일본대사의 안내로 박근혜 대통령이 연단에 올랐고 도쿄에서는 아베 총리가 마이크를 잡았다. 박 대통령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화해와 상생으로 내려놓자”고 하였고 아베 총리는 “앞으로 50년을 위해 손잡고 새 시대를 열자”고 화답하였다. 행사의 주제는 ‘함께 열어요! 새로운 미래를! (Let us open jointly, a new future)’였다. 한일 간의 화해 협력 신뢰 그리고 미래를 강조하는 두 정상의 축사 연단에는 상기 성산별곡의 6폭 병풍이 각각 놓여 있었다.
한일기본조약은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전 총리와 외종조부 사토 에이사쿠(기시 총리의 친동생) 당시 총리, 한국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이 깊이 관여하여 이루어 낸 조약이다. 50년 후에는 그들의 손자와 따님이 총리로서 그리고 대통령으로서 이를 축하 기념하는 행사에 참석하게 된 것은 세계 역사에 유례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1965년 6월22일 한일 양국의 대표가 서명한 한일기본조약(한일협정)에는 1)어업협정 2)재일교포법적지위협정 3)경제협력협정 4)문화재협정 등 4개의 협정과 25개의 문서로 되어 있다. 50년 전 한일 기본조약이 양국이 마음에서 화해를 이루고 만들어 낸 조약이 아니었다. 냉전하의 미국의 세계전략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이 손을 잡도록 한 미국이 관여한 사실상의 ‘3국 관계’의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한일 기본조약은 전문에 기술되어 있는 것처럼 1951년 9월8일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연합국과 일본과의 강화조약을 배경으로 한다. 이른 바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일환이다.
미국의 워싱턴 D.C를 방문할 때 덜레스 공항을 이용하게 되는데 덜레스 공항은 존 포스터 덜레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딘 애치슨 국무장관의 법률고문으로 샌프란시스코 체제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 반공주의자인 덜레스는 소련과의 냉전체제하에서 중국의 공산 통일과 북한의 남침도발로 아시아의 공산화에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덜레스는 일본을 공산주의의 물결을 막는 방파제로 생각하고 일본이 식민지 지배라든지 침략에 대한 충분한 사과 배상이 없었음에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일본에 주권을 넘겨주고 동일자(9.8)로 미일 안전보장조약에도 서명하였다.
일본의 주권이 회복되자 도쿄의 연합국최고사령부(GHQ)의 시볼트 외교국장의 중재로 1951년 10월 한일국교정상화를 위한 최초 회담이 개최되었다. 그러나 대규모 배상요구를 해 놓고 있는 이승만 정권하에서는 별다른 진전이 없다가 1961년 5월 새로이 집권한 군사정부는 일본의 기술과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국교정상화 회담을 적극적으로 이어갔다. 1961년 11월22일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 의장은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총리를 만나 협조를 부탁하였고 다음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 간에 협상내용에 합의하였다.
샌프란시스코 시청 건너편에 전쟁기념 오페라하우스 건물이 있다. 매주 월요일만 관람이 되어 최소 2주 전에 신청해야 내부 투어가 가능하다. 이 오페라하우스에서 일본이 항복하기 전인 1945년 3월부터 6월까지 국제법 변호사인 덜레스가 중심이 되어 국제연합(UN)헌장을 만든 곳이며 1951년의 일본과 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의 산실이기도 하다.
덜레스 고문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남침 5일전에 방한하여 38도선을 시찰, 북한의 동정을 살피고 갔다. 그는 후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국무장관(1953-1959)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반공의식은 월남의 평화를 위한 제네바 회의에서 당시 중국의 저우언라이(周恩來)총리가 내민 악수를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중국의 공산화와 북한의 남침으로 한반도의 상황이 위급할 때 반공주의자 덜레스는 태평양과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을 반공 보루로 만들었다면 50년이 지난 지금도 지정학적 구도는 비슷하다. 해양굴기를 앞세우는 중국의 부상에 대처하여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같은 동맹국인 한일 양국의 결속을 도모하는 것이 미국의 재 균형 전략(Pivot to Asia)으로 보인다. 미국 국무성은 이번 행사에 대해 한일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양국뿐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와 전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증진한다면서 한일 관계개선은 한미일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
세계는 빠르게 바뀌고 있다. 특히 북한의 핵 위협에 노출된 한국은 안보면에서 미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경제적으로도 국제사회에서 성공한 두 나라가 자본과 기술을 합쳐 서로 손을 잡는다면 제 3국에서 못할 일이 없다. 이제 50주년을 지났지만 앞으로 국교정상화 100주년을 내다보면서 긴 호흡으로 한일 관계를 바라보아야 한다.
양국 정상이 이번행사에 교차참석으로 한일관계는 완연한 봄이 왔다고 낙관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봄을 맞이하기 위해 8월15일 예정된 아베 총리의 종전 70주년 특별담화를 기다려야 한다. 아베 총리는 담화에서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죄를 행동으로 보여야 한다. 담화내용에 따라 성산별곡처럼 “떼구름 거느리고 눈까지 몰아오는 삭풍“이 다시 불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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