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감옥’ 견뎌낸 102명 … “밭일 헌께 인자 살 것 같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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읍내에 가는 김순태(80)·이금자(76)씨 부부(왼쪽부터)를 향해 박유현(72·오른쪽)씨가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넸다. 2주 만에 본 이웃에게 전하는 반가움이다. 전북 순창군보건소 직원(왼쪽 셋째)은 이날 격리가 풀린 순창군 장덕마을을 돌아다니며 혹시 메르스 의심 증상이 없는지 주민들의 체온을 쟀다. [프리랜서 오종찬]

19일 오전 8시 전북 순창군 순창읍 장덕마을 입구. 박진순(77·여)씨가 마을로 들어섰다. 마늘밭을 둘러보고 오는 길이었다. 동틀 무렵 일어나 댓바람에 아침밥을 지어 먹고 밭에부터 가봤다.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마늘 일부는 너무 자랐고, 일부는 말라비틀어졌다고 했다. 그래도 입가엔 웃음을 머금었다. 이유는 이랬다. “보름 만에 들판에 나가 시원한 바람 맞으면서 밭일을 허니께 인자 좀 살 거 같혀. 날벼락처럼 쳐들어온 메르스 고놈 때문에 집 안에 꽁꽁 처백혀 있으니께 하루가 한 달처럼 길고 지루했제. 감옥이 따로 없드만, 잉.”

 차를 몰고 마을로 들어서던 이모(46)씨가 “아이코, 얼굴 잊어버릴 뻔했네요”라며 박씨에게 인사를 건넸다. 순창읍 중심가에서 열쇠·도장 점포를 운영하는 그는 “오전 5시에 일어나 읍내 가게로 달려가서는 쌓인 먼지를 털어냈다”며 “2주간 가게 문을 못 열어 속으로 끙끙 앓았는데 어젯밤에는 통행금지가 풀린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잠이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으로 인해 전국에서 처음으로 마을 전체가 격리됐던 순창군 장덕마을이 19일 0시를 기해 통제가 풀렸다. 마을의 72세 여성 주민(51번 환자)이 메르스 확진을 받은 지난 4일 오후 마을이 통째로 봉쇄된 지 2주 만이다. 이 여성 주민은 메르스 1번 환자가 나온 경기도 평택 성모병원에 다녀왔다.

 격리 조치 직후 마을로 통하는 길목 네 곳에 경찰 통제 초소가 설치됐다. 주민 102명은 모두 자가격리 상태로 지냈다.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그렇게 2주가 지날 때까지 메르스 의심 증상을 보이는 주민이 나오지 않아 19일 통제가 풀렸다. 이날 오전 6시30분 마을 스피커를 통해 “드디어 읍내에 나갈 수 있게 됐다”는 이장의 목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오랫동안 논밭과 일터를 돌보지 못했던 주민들은 그보다 일찍 밖으로 나와 2주 만에 보는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논밭으로 향했다. 상당수는 아직 조심스러운 듯 마스크를 하고 다녔다. 초·중·고생 11명은 2주 만에 다시 등교해 친구들을 만났다.

 황복님(70·여)씨는 “허리와 무릎이 아파 거의 매일 보건소나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아 왔는데 지난 보름간 꼼짝 못하고 집 안에만 있으려니 징역 사는 것 같았다”며 “맘대로 병원도 가고 상추를 뜯으러 나갈 수도 있게 돼 이제 살 것 같다”고 했다.

 ‘해방의 기쁨’ 속에 일부 우려도 있었다. 김모(67)씨는 “그동안 순창 하면 청정 농산물로 이름을 알렸는데 앞으로는 도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며 “농번기 일손이 필요할 때 일꾼이 오지 않을까 봐 걱정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격리기간 동안 군청 공무원과 경찰이 장덕마을 주민들의 생활을 도왔다. 수확기가 된 오디·블랙베리를 대신 수확해 주고 팔기가 힘들다는 점을 감안해 공무원과 경찰이 단체 구매해 줬다. 몸이 아픈 노인들을 위해 병원에서 약을 타다 주는 심부름도 했다.

 통제는 풀렸지만 보건 당국은 마을 입구에 이동건강상담실을 설치해 앞으로 5일간 운영하기로 했다. 메르스 잠복기가 2주일을 넘어서는 경우가 국내에서 발생해서다. 의심 증상이 있는 주민은 즉시 진료하고, 특히 51번 환자와 밀접하게 접촉했던 14명은 당분간 열이 나지 않는지 등 메르스 의심 증상을 정밀 관찰하기로 했다.

순창=장대석 기자 dsjang@joongang.co.kr
사진=프리랜서 오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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