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선 큰 병원에 모셔야 효도 … 입원 안 되면 응급실 직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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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부모가 아프면 자식들은 모든 가능한 인맥을 동원해 부모를 삼성, 아니면 다른 대기업인 현대가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시켜야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인맥 동원에 실패하면 곧장 응급실로 향한다. 일반 병실에 자리 날 때까지 대기하기 위해.”

 17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가 전한 한국의 독특한 병원 문화다. NYT는 이날 “병원을 쇼핑 가듯 하는 한국인의 병원 문화와 삼성서울병원의 초동 대처 실패가 한국의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를 불렀다”고 진단했다.

 신문에 따르면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 체계 ‘덕분에’ 한국 환자들은 쇼핑하듯 여러 병원을 들른다. 국민건강보험으로 진료비가 저렴해 여러 곳에서 진찰을 받아도 환자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은 많지 않다. ‘기왕이면’ 실력을 갖춘 큰 병원에서 진찰을 받겠다는 게 이들의 심산이다. 한국에서 최고로 평가되는 삼성서울병원에는 그래서 매일 전국에서 모여든 8500여 명의 외래 환자들이 다녀간다.

 메르스 1번 환자는 충남 아산서울의원을 찾은 뒤 경기도 평택성모병원으로 이동, 사흘간 입원한 후 서울 강동구 365서울열린의원을 거쳐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다.

16일까지 162명의 메르스 환자들이 13개 병원에서 발생했지만 이들이 메르스 진단을 받기 전까지 다녀간 병원은 70개에 이른다. 메르스 사태의 조기 종식이 어려운 이유다.

 북적대는 응급실 문화도 문제다. 한국에서 응급실은 위급한 환자가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병실을 얻어내기 위한 우회 통로이기도 하다. 삼성서울병원의 경우 병상이 2000개 가까이 되는데도 빈자리 찾기 힘드니 환자들은 일단 응급실 한 켠을 차지하고 일반 병실 자리가 날 때까지 기다린다. 폐렴으로 오인받은 14번 환자는 응급실에서 사흘간 대기하며 병원 이곳저곳을 다녔다. 그 사이 그의 바이러스는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메르스를 전파했다.

 응급실에서는 또 교통사고 환자나 호흡기·순환기 환자, 유아 환자 등 온갖 종류의 환자와 이들을 치료하는 전 과목의 의료진이 한꺼번에 뒤엉킨다. 보호자나 방문객 등 일반인도 자유롭게 출입이 가능하다. 바이러스에서 무방비로 노출되는 인원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삼성서울병원 산부인과 병동에 입원한 임산부도 응급실에 내원한 어머니를 보호자 자격으로 찾았다가 메르스에 감염됐다.

 그리고 병원을 ‘벼룩 시장’으로 만드는 한국의 간병 문화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한국의 병실은 공식 의료진만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간호의 보조 역할로 가족이나 이들이 고용한 사설 간병인이 환자 옆에 24시간 머물며 치료를 돕는다. 대형 병원은 이들 간병인으로 언제나 북적인다.

여기에 친지와 친구·동료가 과일 바구니를 들고 환자를 병문안하는 것이 한국 사회의 에티켓이다. 권덕철 중앙메르스대책본부 총괄반장은 신문에 “간병인과 보호자들이 통제되지 않는 병원 문화를 정부가 점검해야 한다”고 밝혔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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