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8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1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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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그동안 중단되었던 조선일보와 중외일보의 그뒤 이야기를 계속하기로한다.
1925년 9월 신일용이 집필한 사설 『조선과 로서아와의 정치적 관계』때문에 조선일보는 무기정간을 당하고 좌익기자들과 이상협일파가 다 퇴진하였는데 이상협은 다시 중외일보를 창간, 경영하다가 재정난으로 1931년에 폐간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상협 일파가 퇴각한 뒤 신석우·최선익이 운영권을 쥐고 경영하면서 1926년에는 사옥을신축한 견지동으로 이전하고 1927년 사장 이상재가 별세하자 신석우가 사장으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l928년 5월 안재홍이 집필한 사설 『제남사건의 벽상관』때문에 조선일보는 또 무기정간을 당하고 안재홍은 금고 8월의 언도를 받았다. 이로 인한 경영난때문에 조선일보는 공무원을 일단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정간이 해체된 조선일보는 신석우가 운영해 나갔으나 기진맥진하여 1931년 5월 사장자리에서 물러나고 안재홍이 사장이 되었다.
안재홍은 영업국장 이승복과 함께 사의 운영에 고심하던 중 이런 사건이 생겼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란 것이 발발해 일·중 양군 틈에서 재만동포들이 억울한 희생을 당하게 되자 10월에 각계인사 60명이 모여 재만동포구제회를 조직하였다.
이 모임에서 안재홍이 상무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조선일보사가 구호금과 위문품을 모집하게 되었는데, 그때 극도의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에서 그 구호금의 일부인 7천원을 유용하였다. 이 사실이 어떻게 탄로되어 사장 안재홍과 영업국장 이승복이 공금횡령죄로 수감되었다. 이로 인해 재만동포구제회는 해산되고 안재홍·이승복도 사표를냈다.
이에따라 조선교육회회장으로 명망이 높은 유진태가 사장이 되고 홍승길이 영업국장이 되었다. 그러나 취임한지 두달이 못되어 판권소동이 일어나 유진태는 물러나게 되었다. 그것은 조선일보의 판권이 채권자인 임경래에게 넘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임경래는 동래사람으로 측량기수를 오랫동안 한 사람인데 고리대금과 도박을 해 큰돈을 모았다.
어떻게 된 인연에서인지 영업국장 이승복이 조선일보의 판권을 담보로 하여 임경래에게서 돈을 몇만원 꾸어쓴 일이 있었는데, 안재홍사장과 이승복영업국장이 오랫동안 감옥에 있게 되자 그 틈을 타 총독부에 대해 조선일보의 발행인을 자기이름으로 변경하는 신청서를 냈다. 임경래는 그때 경무국 도서과 사무관으로 있는 초심상치와 절친한 사이였다.
이것을 믿고 임경래는 조선일보의 새 주인으로 자처해 사장실에 버티고 앉아 있었다. 그러나 편집국장 한기악이하의 사원들은 사원총회와 지국장회의를 열고 전통있는 조선일보를 총독부의 앞잡이인 임경래 이름으로 발행할 수 없다고 해서 신문제작을 거부하였다. 혈기 왕성한 젊은 패들은 사장실에 버티고 앉아 있는 임경래를 완력으로 끌어내기도 하였다.
이 꼴을 당한 임경래는 견지동사옥에서는 신문을 발행할 수 없음을 알고 전에 시대일보를 발행하던 명동의 동순태빌딩을 세 얻어서 임시 사옥으로 정하고 활판인쇄기를 설치해놓고 따로 조선일보를 임경래의 발행인 명의로 발행하였다. 이래서 한때 두개의 조선일보가 나오기도 하였는데 임경래는 7월29일까지 4면신문을 발행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견지동의 정통파사원들은 민족지도자의 한사람인 조만식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조병옥이 영업국장겸 전무가 되어 자금을 마련하러 나섰고, 주요한이 편집국장이 되어 조선일보를 속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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