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강한 정부의 조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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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기조가 공권력의 집행을 강화하는 쪽으로 바뀐다고 한다. 그저께 취임 1백일 기자회견에서 盧대통령이 "법과 질서 속에서 이뤄지는 대화와 타협의 원칙"을 강조한 데서도 이 같은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대화와 타협만 강조하다 다중의 힘에 밀려 국정혼란을 자초한 정부가 뒤늦게나마 이를 반성하고 개선하겠다니 다행이다.

하지만 새 기조로 추진하는 '강한 정부'가 혹시라도 역대 정권이 궁지에 몰릴 때마다 전가의 보도로 내놓았던 처방처럼 사정(司正)을 강화해 국민을 벌벌 떨게 만드는 것이라면 더 큰 난관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우려하게 되는 것은 아직도 국정혼란의 원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면 그런 것은 보도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盧대통령의 발언처럼 집권 초기 1백일간 국정이 실패한 이유를 국정 담당자들의 미숙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으려는 경향이 정부 내에 널리 퍼져 있다는 느낌이다.

이번 국정기조 전환을 기획하는 데 참여한 정부 관계자가 "정권 잡은 뒤 힘을 보여준 적이 한번도 없다"며 힘을 앞세우는데 혹시라도 미운 놈을 손봐 주겠다는 감정이 깔려 있다면 큰 일이다.

영(令)이 서지 않는 것은 정부의 힘이 없어서도, 권력에 대한 공포심이 부족해서도 아니다. 법과 원칙, 그리고 시스템을 무시한 즉흥적이고 오락가락하는 정책결정 과정 때문이다.

금전수수 혐의를 받는 대통령 측근을 '정치적 양심수'라고 떼를 지어 변호하고, 부동산 대책을 소나기식으로 쏟아내면서 대통령 주변 인물들의 투기 의혹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라고 하니 어떻게 영이 설 수 있겠는가.

국법을 수호할 임무를 맡은 대통령이 불법행위를 보고도 "공권력으로 수백명을 해고하고 사법처리하는 것보다는 (양보가) 낫다"고 하니 법질서가 바로 설 리 없다.

강한 정부는 법과 원칙을 지킬 때 만들어진다. 새로운 처방은 지난 1백일의 국정운영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한 토대 위에 마련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