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74) - 30년대의 문화계 (107)|육당 최남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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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육당 최남선은 이상협의 권유에 따라 l935년쯤부터 매일신보 학예면에 장기집필을 시작하였다. 그는 시대일보에서 물러난후 종로6가에 있는 강사동에 칩거중이다가 l928년 조선총독부의 관할 아래 있는 조선사편수회의 편수위원이 되었다. 이로인해 독립선언서를 기초,독립운동의 중핵인물이었던 그로서 변절한 것이라 하여 식자간에 물의가 분분하였다.
그뒤 그는 중추원참의가 되고,이어 만주국 건국대학의 교수가 되었는데, 이 변절문제에 대해서는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고 다만 그 이전인 시대일보 창간까지 그가 우리나라 문화계에 남긴 족적은 30년대 문화계를 이야기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관련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시대일보발간까지 그의 행적을 더듬어 가기로 한다.
그는 1908년 우리나라에서 종합잡지의 시초인 『소년』 을 간행하였고, 이것이 『청춘』 으로 연장되어 1918년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청춘』 은 만세후에 나온 『개벽』과 『조선문단』 으로 선이 연결된다.
다음 시대일보는 중외일보의 전신이 되었고 중외일보는 조선중앙일보의 전신이 되어 1936년까지 이르렀으므로 이 역시 30년대 문화계에 관련되어 있다고 볼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변절문제가 일어나기 전까지 그의 행적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최남선은 1890년 서울에서 출생, 1902년 경성학당에 들어가 일어를 배우고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동경 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유학 3개월만에 귀국하였고 1906년 재차 동경에 가서 조도전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였다가 조도전대학생들의 한국 황실 모욕사건으로 한국인 유학생이 총퇴학하는 바람에 학업을 포기하고 수영사 인쇄소에서 활판인쇄기구 일체를 사가지고 귀국하였다.
동경유학시대 첫번째 부입일중시대에는 기미독립운동의 총기획자인 최인을 알게되어 여기서 독립선언서를 기초할 기연이 생긴 것이고, 그후 조도전시대에는 벽초 춘원을 알게되어 신문학운동은 이들 3천재를 주축으로 하여 일어나게된 것이다.
최남선은 1907년 지금의 을지로2가에 있는 자택을 개수해서 출판사와 인쇄소를 만들고 신문관이란 간판을 걸었다. 이 신문관이 우리나라 신문화운동의 발상지가 된 것이다.
1908년 공장을 정비, 11월에 월간종합잡지 『소년』 을 창간하였다. 그때「소년」이란 뜻은 노년에 대한 소년으로 지금의 「어린이」 와는 달라 젊은 사람이란 뜻이었다. 잡지내용도 따라서 지금의 소년잡지가 아니라 청년들이 읽을 교양잡지였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최근 「잡지의 날」 을 신문관의 『소년』 이 나온 11월로 정한 것이다.
이 『소년』 창간호에 유명한 『해에게서 소년에게』 란 신체시가 실렸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문학사상 처음 나타난 국한문으로 된 산문형의 자유시였다.
잡지 『소년』 은 자주 압수를 당하였지만 1911년까지 4년동안 23호를 내고 페간되었다.이 잡지를 만드는 일은 최남선이 혼자서 원고를 써냈는데, 그 모본은 그가 동경에서 모아가지고 온 『신학문책』 이라고 일컫는 일본 잡지·과학책·지리책등이었다. 이 책들이 육당이 거처하는 방 다락속에 가득차 있었는데 이 책들을 꺼내 이용했다고 한다. 말하자면그 책들은 우리말로 번역해서 베낀 것이었다. 초창기의 잡지로서는 어쩔수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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