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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사 반성, 독일은 진행형] 下. 피해자 보상은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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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폴란드 아우슈비츠 나치 강제 수용소

과거사 청산의 교훈장인 독일 베를린의 유대인 박물관과 불과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특이한 간판을 내건 건물이 있다. 마르크그라펜 슈트라세 12-14번지. '기억, 책임 그리고 미래(evz)' 재단이다. 재단의 이름은 2000년 8월 독일 연방 의회가 통과시킨 법에서 따왔다. 당시 세계 언론은 역사상 유례없는, 아주 뜻깊은 법이 생겼다고 반겼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강제로 동원한 외국인 노동자와 피해자에게 배상하기 위한 법이기 때문이다. 재단 기금 50억 유로(약 6조5500억원)는 정부와 기업이 절반씩 출연해 조성했다.

법적 근거가 약해 배상을 받지 못했던 동유럽과 옛 소련지역의 외국인들을 위한 재단이다. evz재단 대변인실에는 세계 각국의 피해자들이 보내온 편지와 서류가 가득 차 있다. 2001년 8월까지 1년간 접수한 배상 신청자들에 대한 확인절차를 거쳐 161만 명이 수혜자로 결정됐다. 1인당 지급액은 최고 7669유로, 최저 2556유로로 책정됐다. 강제 노동자뿐 아니라 신체.재산상의 손실을 본 피해자도 배려했다. 전쟁포로가 아닌 민간인으로서 강제수용소에 갇혔거나 생체실험의 대상이 됐던 사람들도 포함된다. 또 독일기업이 개입해 재산을 빼앗기거나 잃게 됐을 때, 국외탈출로 인한 보험상의 피해도 배상을 해주고 있다.

독일의 나치 피해자 배상은 연방배상법이 시행된 1953년부터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614억 유로(약 85조원)의 배상금이 지급됐다.

카이 헨니 재단 대변인은 외교부에서 재단으로 파견나온 중견 외교관이다. 그는 "배상금 지급 작업이 이제 마무리 단계"라면서 "올 연말께에는 임무가 모두 끝나 원래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재단 이름이 인상적이라는 지적에 그는 동유럽 유대운동가였던 발 솀 토브의 경구를 들려주었다. "망각하려는 것은 유랑을 연장시키고 기억이야말로 구원의 열쇠다"라는 것이다. 전후 독일 정치가들이 과거사 반성 때 자주 사용했던 말이다. 리하르트 바이츠제커 전 대통령은 연설에서, 요슈카 피셔 외교장관은 이스라엘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희생자 추모기념장소인 야드 바솀의 방명록에서 이 구절을 인용했다.

베를린=유권하 특파원

*** 헨니 '기억.책임, 그리고 미래' 재단 대변인

카이 헨니(사진) 대변인은 "금전으로 과거를 청산하려는 것이 재단의 설립 목적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나치 정권의 혹독하고 무자비한 탄압에서 겪어야 했던 피해자들의 고통은 어떤 방법으로도 말끔히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배상은 희생자를 위로하고 과거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의 표시"라고 설명했다. "재단을 세운 취지는 폭력정권의 폐해와 사회정의를 잊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이다.

-기금을 출연한 독일 기업들은.

"도이체방크.드레스드너방크 등 금융권과 다임러크라이슬러.지멘스.티센그룹.폴크스바겐 등 17개 제조업체가 주축이다. 대부분 나치 시절 강제노동자를 동원해 혜택을 본 기업들이다. 이 밖에 나치와 전혀 관계없는 전후 기업들도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피해자들의 출신지역이 다양한데 어떤 식으로 배상 신청을 받았나.

"해외협력 기관의 도움을 통해 현지 접수를 많이 했다. 신청기간 1년간 우편.팩스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접수했다. 증빙서류가 부족해도 일단 신청을 받고 추후에 확인작업을 했다. 신청서는 독일어가 아닌 자국어로 작성토록 했으며 특별한 양식 없이 자유롭게 쓰도록 했다."

-어려웠던 점은.

"수혜자격을 심사하는 일이었다. 오래된 일이라 신청자들이 증빙서류를 찾기가 힘들어 주변 정황을 감안해 최대한 인정해 주었다. 배상금이 제대로 전달되는지를 확인하는 일도 간단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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