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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수상자의 산실 미 록펠러대학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미국석유재벌「존·록펠러」는 1901년 정월, 그의 귀여운 맏손자「맥코맥」이 성홍열에 걸려 죽었을 때 의사들로부터 이 병의 원인을 모른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즉시 미국최초로 병리전문연구 장학기금을 내놓았고 곧이어 록펠러병리연구소도 창설했다. 이 연구소가 오늘날 록펠러대학의 모체가되었다.
이 학교는 정상적인 교육이나 환자치료의 부담 없이 오직 생의학연구에만 몰두해왔다.
그 결과 1912년 첫 노벨상수상자를 배출한 이래 금년 「브루스·메리필든 교수가 노벨화학상을 받을때까지 모두 l7명의 노벨상수상자를 배출했다.
기자가 뉴욕 이스트강을 옆으로 끼고 펼쳐진 록펠러대캠퍼스를 찾아갔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여느 대학에서처럼 한가하게 학생들이 정원에 앉아 쉬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학과가 따로 갈라져 있지도 않고 강의도 없이 학생과 교수들이 하루종일 실험실에서만 일하기 때문에 점심시간외에는 휴식시간이 따로 없었다.
이 같은 여건속에서 이 대학은 생의학분야에서 많은 개척을 했다. ▲최초로 자연상태의 항생제를 분리시키는데 성공했고▲유전의 열쇠인 DNA를 규명했으며▲암이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될수도 있다는 사실을 최초로 규명했고▲혈액을 보존할수 있는 방법을 창안해서 오늘날과 같은 혈액은행이 가능하게 한 것 등이 그 예다.
이 처럼 많은 실적의 비결을 홍보담당관 「바르도시」씨는 『연구원들이 모든 잡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구에만 몰두하도록 방임하는 분위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이번에 노벨상을 탄 「메리필든」 교수는 지난 3년 동안의 연구결과도 제출하지 않았고 발표논문도 없었지만 아무런 압력도 받지 않고 결과가 불확실한 실험을 계속할수 있었다는 것이다.『다른 어느 연구소에서 실적 없이 3년을 견딜수 있겠느냐』고 「바르도시」씨는 반문했다.
또 하나 이 대학의 장점으로 꼽히는 것은 작은 규모.
연구팀은 적게는 3명으로부터 많아야 35명. 50개 실험실에 배치된 각 팀은 1명의지도 교수아래 연구원·학생수가 필요에 따라 배정되는데 학과가 갈라져있지 않아 각 분야의 전문지식이 쉽게 동원될 수 있다.
각 연구팀간의 협조가 연구분야의 벽을 넘어서 끊임없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다. 학생수가 적다는 것은 학생의 질이 우수하다는 말과 통한다. 특이하게 이 대학에는 대학생이 없고 대학원생만 1백명이 있는데 입학시험은 연구실적과 추천서, 그리고 면접이 전부다.
한국학생이 입학한 적은 없으나 일본과는 산토리회사와의 교환계획에 따라 상당수의 일본학생 및 연구원들이 와있다고 「조슈어·레더비거」총장은 말했다. 이 학교에서는 학생이 등록금을 내지 않을 뿐 아니라 생활비도 지급받고 기숙사에서 숙식한다.
학생수를 더 늘릴 계획은 없느냐는 질문에 따라 그는 연구를 위한 『다이내믹한 평형상태가 깨어지지 않으려면 현재의 규모가 적정선이라고 말했다.
학생수보다 교수의 수가 더 많은 현재의 비율이 깨어지면 학생 개개인에 대한 교수의 집중력이 떨어지고 사제간의 친숙한 관계가 흐트러져 연구활동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다. 이 대학은 처음 「존·록펠러」가 기부한 4백85만달러 중에서 3백58만달러를 기금으로 삼아 그 이자로 운영했다. 그러나 시설이 커짐에 따라 운영이 어렵게되자 정부보조와 개인기부금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이 대학의 연간예산은 5천5백만달러 수준으로 이중 40%가 정부보조, 25%가 기금이자이며 나머지가 개인기부금으로 충당되고 있다.【뉴욕=장두성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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