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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덮어둔다고 해결 안된다|안개가 아무리 짙어도 「있는것은 있는법」| 서로 감속 운행해야 불상사 막을수 있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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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야릇하여라. 안개속을 헤맴은…』하고 독일시인 「헤르만·헤세」가 노래한 농무의 계절이 찾아왔다.
서울의 새벽은 이즈음 며칠째 시계 50m의 짙은 안개가 끼어 출근차량들이 감속운행을 강요당하고 있다. 김포공항에 착륙할 예정이던 국제민항기가 기수를 돌려 김해공항에 기착했다는 소식도전해지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러나 새벽에 안개가 끼는 날은 대개 해가 중천에 오르면 맑게 갠다는 사실이다. 자연속에서 오랜 세월동안 농사를 지어온 농부들은 그것을 체험을 통해서 알고있다.
라인강이나 도나우강과 같은 장강이 많은 유럽에 비해서 우리나라의 연간 안개일수는 그리 많다고 할수는없다. 그런데도 이즈음엔 안개가끼는 날들이 예전보다는 늘어가고 있는것 같다.
춘천의 경우엔 연간 안개일수는 35일이었던것이 소양강 댐이 생긴 다음부터는 70일로 곱절이나 늘어났다던가.
자연의 조화로써만 안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개발이 또한 안개를 불러일으켰다고도 볼수 있다.
「자연의 안개」에 대해서 이건 「문명의 안개」라고나 해야 할 것인지…. 그러한 인공의 안개가운데서도 특히 악명높은 것이 공장의 굴뚝이 뿜어대는 「산업화의안개」, 이른바 스모그다. 코트의 상표로까지 이름을 떨친 「런던의 안개」는 어떤 의미에선 산업혁명을 선구했던 영국 문명의 한 상징이었다고도 할수 있다.
나는 60년대말 그 전설적인 「런던의 안개」에 젖어보겠다는 다소 감상적인 기대를 갖고 이른 봄의 영경에서 한달을 지내보았으나 단 하루도 안개낀 날을 만나지 못해 꽤나 실망하고 돌아온 일이 있다. 런던의 안개는 그야말로 과거의 전설로서 이미 걷혀버린 뒤가 되어 있었던것이다.
내가처음으로 스모그현상을 피부로 체험하게 된곳은 런던이 아니라 동경-70년대초의 동경이었다. 때는 한여름이었으나 저녁 6시만 되어도 가랑비처럼 흐르는 스모그 때문에 날이 어둑어둑해져 나는 내 시계가 멎었나하고 귀에 가져다 대 보기 조차했었다.
그로부터 10년-80년대초다시 들러본 동경은 주중인데도 부사산의 원경이 전망될수있을 정도로 하늘이 맑게 개있었다. 인구 1천만의 공업도시가 깨끗한 공기를 되찾아 놓았다는 이 기적과 같은 사실에 나는 그저 경악을 금치 못 하였다.
서독에서는 지금 일본수준으로 차량의 매연단속을 할것인가, 말것인가로 논란을 벌이고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말하자면 공해문제라 일컫는 산업화의 안개 또한 산업화를 중단함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그를 관철함으로써 문명의 태양이 중천에 으르면 맑게 걷힐수도 있다는 선진의 사례를 런던과 동경은 시위해주고 있는 셈이다.
말은 쉽지만 한나라가 「산업화」를 이룩한다는것은 참으로 엄청나고 거창한 역사다. 그것이 수반하는 난문제들이 어찌 안개같은 공해문제뿐이겠는가?
더욱 심각한 문제, 더욱 본질적이고 더욱 인간적인 문제로는 바로 산업화를 추진함으로써 당연·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노동문제도 있다. 산업화를 추진하면서도 노동문제가 없는것처럼 시치미를 떼는것은 화덕에 불은 마구때도 굴뚝에서 연기는 나지 말라고 억지를 쓰는것과 같다.
그러나 공해문제와 마찬가지로 노동문제도 또한 「후진적」인 자세에서가 아니라「선진적」인 자세에서, 오직 선진적인 자세에서만 해결될수있고 아니, 이미 해결되고있다는 사실을 자유민주주의의 선진국에서는 보여주고 있다.
60년대말 유럽에서 이른바신좌파의 스튜던트파워의 난동이 극에 치달았을때 서독에서는 경찰에 쫓긴 과격파학생들이 노동자주택가에 피신을하면 베란다에서 그를 지켜본 근로자들은 학생들 머리위에 세수대야물로 물벼락을 퍼부어 내쫓곤하던 광경을 보여주었다.
대의제 민주체제가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곳에서는 극렬한 스튜던트 파올가 아니라 기성의 정치조직이나 정치활동이 노동문제를 수렴해 그를 합리적·현실적으로 해결해주고 있다는 노동자들의 깊은 신뢰가 베란다의 물벼락으로 시위되고 있었던것이다.
그러나 같은 학생운동이 프랑스로 비화해서는 노동운동과 결합해서 68년5월 파리의 대불상사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즈음 대학의 캠퍼스에는 또다른 안개가 시계를 흐리게 하고있다. 런던 포그가 아니라 폐퍼 포그라는 이름의안개가-.
이 나라의 대학이 어디로갈것인지…. 최루탄가스에 시야가 흐려오는 눈으로는 50m앞의 미래도 전망되지 않는것만 같은 답답한 심정이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무슨일이 있어도 우리나라의 학생운동이 68년5월의 파리와같이 노동운동과 결합되는 불행이 있어서는 아니되겠다는 사실이다.
공해문제든 노동문제든, 또는 학원문제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실마리는 도대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그를 직시하고, 그럼으로써 그와 대결하는 길이다. 있는것을 없다고 덮어두는한 문제의 해결도 있을수없다.
아무리 짙은 안개가 끼어있어도 있는것은 있다. 보이지는 않아도 있는것은 있는것으로 알고 서로 감속운행을해야지 안보이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하면서 그냥 내닫기만 하면 뜻하지 않은 층돌사고가 날수도 있을 것이다. 야릇하여라, 안개속을 헤맴은….
최정호<연세대교수·신문방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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