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소주 친구삼아 소설 쓸 때 제일 행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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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환갑이 4년 전이었고 칠순은 좀 떨어져 있지만 올해는 소설가 이청준(64)씨에게 특별하다.

1998년부터 시작한 '이청준 문학전집'(열림원) 24종 25권의 발간이 지난 3월 장편소설 '흰옷''축제'를 마지막으로 그 대장정을 마무리지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편 '당신들의 천국'(문학과지성사)은 1백쇄째를 찍었다.

65년 '퇴원'으로 등단한 후 37년여에 이르는 이청준 문학의 결산을 위해 출판사와 대산문화재단, 문단 선.후배들이 '이청준 소설의 넓이와 깊이'라는 주제로 지난 20일 심포지엄을 열자, 이씨는 '결산은 무슨 결산이냐'는 듯 새로운 장편소설 '신화를 삼킨 섬'(1.2권, 열림원)을 내놓았다.

인터뷰를 요청하자 이씨는 결혼생활 35년째인 부인 남경자(60)씨와 함께 나타났다. 이씨의 하얀 백발과 염색을 했다고 밝히기는 했지만 부인 남씨의 까만 머릿결이 묘한 대조를 이뤘다.

그의 대표작 '당신들의 천국'을 통해 우리는 선의를 가지고 현실을 개선하려는 기획자들과 수혜자들 간의 메워질 수 없는 간극, 그 단절의 세계를 경험했다.

심포지엄에서 권오룡 한국교원대 교수는 이씨의 소설 세계를 "억압적인 정치현실에 대해 선뜻 인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는 '망설임'의 자리에서 이씨의 자의식이 싹트고 소설 양식이 뿌리내린 것"으로 정리했다.

장경렬 서울대 교수는 삶의 본질을 깊이있게 성찰하다 보니 이야기는 관념적.사변적으로 전개되고 긴장이나 속도보다 지연과 정체가 서사를 지배하게 된다고 분석했다.

이씨는 "얼마든지 고쳐 쓸 수 있는 문학언어와 달리 사람들 앞에서 뱉는 언어는 고칠 수 없다. 그런 심리적인 불편함 때문에 눌변이라는 얘기를 듣게 되는 것 같다"며 심포지엄 참석이 내키지 않았던 사연을 소개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 문학 담론이라는 게 어차피 더듬고 헤매고 물고 하는 것이고, 전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작품들을 반복해 읽었기 때문에 내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보다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 사람이 나라는 생각에 참석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씨는 새 소설에 나타난 변화를 얘기했다. '신화를…'은 80년대 초반 제주도의 심방(무당)들이 4.3사건의 한을 풀어내는 과정을 담았다.

이씨는 "나이가 가르쳐 준 건지 어떤 건지, 인간의 삶 너머에 드리운 겹, 그것을 넋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넋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또 "넋을 담고 있는 신화의 세계는 유전자처럼 인간이 몸 속에 지니고 태어나는 것으로 좀 더 보편적인 인간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햐 하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끝없이 소설적 변모를 추구하는 이씨의 부지런함은 어찌보면 강박적이다.

소설을 쓰지 않으면 공중에 붕 뜬 것 같고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가장 편안하다는 이씨는 오후에 네다섯 시간 작업하고,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이야기의 실마리들을 잊기 위해 평균 소주 한병 정도 마시고 잠자리에 들고, 다음날 오전은 숙취에서 전날 작업을 기억해 복원해 내는 데 소비하는 과정을 지루하게 반복하고 있다.

몇해 전 당뇨가 찾아온 뒤부터 부인 남씨가 어김없이 야채 위주 식단을 챙겨주기 때문에 야채를 주식으로 술을 안주 삼아 마신다고 했다.

남씨에게도 뭔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남씨는 사진촬영에만 간신히 응했을 뿐 수줍은 듯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대신 이씨는 "돈도 제대로 못버는 주제에 성질은 더러운 소설가가 화풀이 할 데라곤 식구들밖에 더 있겠느냐"며 슬쩍 가정사를 들쳐 보였다. 혹 '술좀 그만먹으라'는 소리를 아내로부터 들은 날은 일부러 더 마셔댔다고 한다.

"술과 담배에 관한 한 절대 양보가 없었고 지금도 담배는 하루에 다섯갑까지 핀다"고 했다. 남씨는 이발소 가기 싫어하는 남편의 머리를 30년 넘게 깎아주고 있다.

한국 문단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고 그 발걸음이 아직도 활발한 이씨 곁에서 남씨는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아 보였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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