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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자극하는 고품격 만화, 아날로그·디지털 세대 벽 허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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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면

서울 강동구 성안마을 강풀 만화거리 한 모퉁이에 그려진 벽화. 강풀의 순정만화 ‘바보’의 주인공인 승룡(왼쪽)이 좋아하는 지호를 위해 준비한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서보형 객원기자

40대 회사원 김창식씨. 언제부터인지 고교생 아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지난 주말 “오늘 학교에서 별일 없었어?” “시험은 잘 치렀니?” 나름 애정을 갖고 물었지만 아들의 대답은 시큰둥했다. 그러다 아들의 스마트폰 화면을 살짝 훔쳐봤다. 인터넷 만화 웹툰이었다.

김씨는 “‘마음의 소리’(개그 만화)도 재밌지 않냐”고 묻자 아들은 “광팬이지만 요즘 스쿨 만화를 즐겨 본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용을 묻자 아들은 이야기 보따리를 신나게 풀어놨다. 김씨도 요즘 퇴근길에 즐겨 보는 웹툰이 있다. 지난해 ‘미생’에 이어 올해는 ‘송곳’을 탐독 중이다. 모두 직장인의 애환을 다룬 만화다. 아들은 “저도 미생을 봤는데 직장생활이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며 아빠를 위로했다. 김씨와 아들은 만화로 시작된 대화로 자정을 훌쩍 넘겼다.

만화영화 ‘겨울왕국’은 지난해 국내에서 1000만 관객을 끌어모았다. 어린이 만화인데도 20~30대 연인과 30~40대 남성 관객이 적지 않았다. 배경음악인 ‘렛잇고(let it go)’도 덩달아 큰 인기를 끌었다.

예술의전당, 국내 만화가에 문호 개방

만화가 요즘 모든 세대가 즐기는 문화 콘텐트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정부가 한때 사회악 등의 이유로 만화를 불태웠던 곳인 남산이 이젠 ‘만화의 메카’로 불린다. 이곳에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만화영화관이 들어섰다. 만화 축제도 열린다. 도시도 만화로 옷을 갈아입고 있다. 서울 성내동과 명동엔 만화거리가 조성돼 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만화가 허영만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문턱 높은 예술의전당에서 열리는 첫 만화 전시회이자 우리나라 만화가로는 처음이다. 만화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얘기다.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픽토스튜디오의 전유혁(44) 대표는 “과거와 달리 탄탄한 이야기를 갖춘 고품질 만화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며 “영화·게임·출판·캐릭터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돼 모든 세대가 즐기는 창작문화로 주목받고 있다”고 말했다.

만화는 인터넷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지금의 40대가 만화책을 보고 자랐다면 그 자녀들은 인터넷으로 즐기고 있다. 출퇴근길에 스마트폰으로 만화를 보는 30~40대 성인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들이 구매력을 발휘하면서 만화가 드라마·영화로 재탄생하고 유료로 바뀌어도 인기가 사그라들지 않는다. 만화 제작사 와이랩의 윤인석(37) PD는 “40대와 10대 모두 만화를 보며 자란 덕에 만화를 통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는 만화가 세대 간 소통의 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작가층 두터워져 대중적 콘텐트 다양

기술의 발달로 1인 미디어 시대가 되면서 작가층이 두터워져 수요층을 넓히고 다양한 콘텐트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구구절절한 서술은 싫어하고 아이콘처럼 간단한 그림을 선호하는 경향도 만화의 인기 배경이다.

아날로그 감성을 찾는 사회 분위기도 한몫한다. 만화방은 불량 청소년이 주로 모여 있다는 오명에서 벗어나 쾌적한 카페식 사랑방으로 바뀌었다. 옆사람과 어깨를 겹쳐야 했던 의자는 사라지고 케이크와 커피를 먹으며 만화를 우아하게 볼 수 있다. 어린이 교육용 학습만화도 배치돼 있다. 휴(休) 카페만화방을 운영하는 정용원(40) 대표는 “만화를 보며 대화하는 가족 단위 고객도 부쩍 늘었다”고 말했다.

청강문화산업대 콘텐츠스쿨 박인하 교수는 “복잡한 메시지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속성 때문에 모든 세대가 즐길 수 있는 대중성을 갖춘 매체가 만화”라며 “할아버지가 본 뒤 아버지가 보고 손주가 볼 수 있는 고품질 만화 콘텐트가 많이 만들어져 한다”고 강조했다.

박정식 기자 park.jeongsik@joon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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