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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지 않아도 즐길 수 있죠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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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호 16면

제자가 스승의 무대에 서는 게 별일은 아니다. 하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이하 한예종) 무용원 전미숙 교수의 현대무용 공연 ‘Amore Amore Mio’(6월 5~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출연진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우선 TV프로그램 ‘댄싱9’ 출연으로 대중에게도 친숙한 최수진, 이선태가 있다. ‘무용계 아이돌’ LDP무용단 김동규 대표와 해외수출 1호 ‘No Comments’를 만드는 신창호 교수도 있다. 또 영국 호페쉬 쉑터 무용단 출신으로 젊은 여성 무용가 중 독보적인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차진엽, 요즘 해외에서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다는 김보라 등 현대무용계의 기린아들이 총집합했다. 각자 자기 이름을 건 공연은 물론 강의, 방송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이들이 밤늦게 연습실에 모여 하나의 무대를 준비한다. 대체 어떤 공연이길래. 이들을 모두 불러모은 스승 전미숙(57)과 제자 차진엽(37)을 함께 만났다.

‘Amore Amore Mio’의 안무 전미숙과 제자 차진엽

연습실에서

25일 오후 한예종 연습실. 9명의 무용수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간식을 먹고 있다. 각자 최고의 용수이자 안무가지만 한예종 동문이기도 한 이들에게선 가족의 냄새가 났다. 무대 장치로 사용되는 육중한 그랜드 피아노를 힘 모아 이리저리 옮기고, 기자에게 커피와 물을 건네기도 했다. 무용극 ‘클럽 살로메’, ‘댄싱9’ 출연 등 ‘살인 스케줄’을 소화중인 최수진도 졸린 눈을 비비며 열심히 뛰고 있다. 차진엽 역시 뮤지컬 안무를 겸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여유로운 미소가 인상적이다.
“수진이가 공주라면 진엽이는 왕비랄까요. 한국 무용수 중에 외모도 최고로 잘 생겼고, 에너지도 대단하죠.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가르쳤어요.”
제자 자랑에 바쁜 전미숙 교수는 ‘세계현대무용사전’에 등재된 대표적인 안무가지만 리허설에선 특별한 지시 없이 믿고 맡기는 분위기다. 2010년 초연 멤버가 거의 그대로 모여 한층 농익은 무대를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Amore Amore Mio’는 2009년 타계한 피나 바우쉬에게 바친 헌정작. 영화 ‘형사’의 OST ‘Sinno me moro’에 맞춰 커피잔을 들고 위태로운 춤을 추며, 아름답지만 깨지기 쉬운 사랑의 기억들을 환기시킨다. 무용 공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유머러스한 안무와 대사, 1000개의 커피잔이 솟아오르는 압도적인 미장센으로 초연 당시 3회 공연 전석 매진, 한국춤평론가회 작품상을 수상한 ‘명품’ 공연이다.

5년 새 제자들도 각자 최고의 안무가가 됐는데 어떻게 모였나요.
전: 이 공연을 꼭 다시 하고 싶었어요. 현대무용 공연을 일반인들은 사실 좋아하지 않아요. 제일 큰 과제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건데, 자칫 작품이 가벼워질까봐 내가 추구하는 바는 아니죠. 그런데 이 작품은 무게감은 그대로인데 관객들도 좋아하시더군요. 제자들이 시간 내기 쉽지 않았겠지만 고맙게도 동참하겠다며 달려와 줬네요.
차: 좋은 작품에 무용수로 서고 싶지만 기회가 별로 없거든요. 다 젖히고 달려왔죠(웃음). 이제는 저희 일들도 체계적으로 진행돼서 공연도 1, 2년 전부터 제의가 들어오니까 스케줄 조정이 가능해요. 다른 일도 병행하고 있긴 한데, 이 기간만큼은 집중하려고 해요.

피나 바우쉬에게 헌정한 작품인데요.
전: 그를 존경하는 건 구도자 같은 에너지 때문이에요. 댄서들도 젊어서부터 몇십 년을 같이 했는데, 무엇보다 그에겐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과 함께 가는 배려가 있었던 거에요. 우리 공연도 한다 하는 현대무용가들이 다 모였지만 일부러 모인 게 아니라 늘 함께 가는 사람들이죠. 제자가 크고 선생이 늙다 보면 관계가 유지되기 어려워요. 독립적인 사고가 생기면 각자 길을 가는 건데, 서로 인정하면서 같이 가고 싶어요. 5년 만에 모이니 각자 깊이와 연륜이 생긴 게 보이네요. 5년 후에 또 하면 어떤 모습일까 싶기도 하고.
차: 피나 작품도 나이 든 무용수들이 주는 감동이 크듯, 이 작품도 그렇게 나올 것 같아요. 근력과 테크닉을 요하는 게 아니라 오래 고아 우려내는 작품이랄까요. 피지컬이 적어도 강하게 느껴지는 건 교수님의 힘이죠. 비웠는데도 강한 힘이 진짜 안무력이거든요. 요즘엔 자꾸 뭘 집어넣는데, 다 빼도 좋은 작품이 명품 아닐까요.

사랑에 관한 이야기인 건 알겠는데, 무용수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나요.
차: 재연이라 더 잘 보이는 것 같아요. 확신을 갖고 나름의 스토리를 만들어 가죠. 예컨대 찻잔의 의미는, 첫 만남은 보통 차 한잔 하겠느냐고 하잖아요. 조심스럽게 건네며 시작되지만 깨지기도 쉬운 게 관계란 거죠. 살면서 겪은 내 만남의 스토리들로 만들어 가고 있어요.
전: 이 작품은 아줌마 부대가 와서 봐야돼요.(웃음) 나이 사십 오십을 넘어가면 여성은 섬세함을 없애며 살아가죠. 그 나이에 사랑이란 감정은 사치라 생각하는데, 그런 감정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게 해주고 싶어요.

현대무용은 추상화 같아서 어려운데요.
전:‘해설이 있는 발레’처럼 현대무용을 해석하면 유치해져요. 추상화도 화가의 의도는 있지만 해석은 다른데, 관객이 안무자의 의도를 그대로 읽으려 드니 힘들죠. 문화적으로 상상하는 힘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아요. 늘 ‘맞냐 틀리냐, 내거냐 네거냐’로만 사니까. 그러니 스포츠 경기는 잘할지 몰라도 자기 세계에 대한 자신은 없는 겁니다.
차: 관객도 이해를 하면 좋았다고 얘기들 하세요. 하지만 처음부터 이해시키려고 만들진 않아요. ‘예술의 대중화’라며 거리로 나가는 것엔 긍정하지 않거든요. 현대무용에 관심이 있다면 공부를 하고 보시겠죠.
두 사람의 인연은 서울예고에서 시작됐다. 발레를 하던 차진엽이 현대무용으로 전향하면서 당시 서울예고 교사였던 전 교수의 제자가 된 것. 그러다 차씨가 먼저 한예종에 입학하고, 전 교수도 한예종에 부임하면서 운명처럼 다시 만났다. 지금은 엄마와 딸처럼 다정해 보이지만 당시엔 전교수 앞에서 고개도 못 들었단다. “진엽인 발레 전공할 때도 최고였어요. 집이 일산인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하는 걸 못 봤죠. 예술가에게 성실하다는 말이 지루한 느낌일지 몰라도, 아무리 바빠도 변함없는 열정과 체력은 정말 독보적이에요.”(전)
“스승의 영향이죠. 교수님도 늘 한결같으세요. ‘조용한 도발자’란 별명도 있지만, 겉으론 평범한 듯 비범한 작품을 하시거든요. 무섭지만 권위적이진 않으세요. 솔로 공연 때는 저희더러 좀 봐달라고 하시는데, 그만큼 인정해주는 거죠. 자기를 낮추지만, 더 위에 있으니까 낮출 수 있는 거잖아요. 조심스럽게 조언해드리면서 저희도 스스로를 존중하게 되고요.”(차)
차진엽은 한예종 졸업 후 유럽 무대로 진출해 영국 호페쉬 섹터, 네덜란드 갈릴리 무용단 등에서 활동하다 2012년 무용가 그룹 ’콜렉티브 A’를 창단하며 국내에 정착했다. ‘로튼애플’ ‘페이크 다이아몬드‘ 등 파격적인 작품으로 한국춤비평가상, 춤평론가상 등을 수상했고, 2014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 안무를 맡기도 했다.
전 교수는 전통적으로 인맥이나 집단의 힘에 좌우되어온 무용계에서 독립무용가로 자기 역량을 다하고 있는 차씨가 무척 자랑스럽단다. 최근 현대무용의 파워풀한 에너지가 대중에게 어필하면서 상대적으로 남성무용수들이 부각되는 현실이라 더 소중한 존재다.
“우리 시대에는 무용이 여성 전유물이었죠. 그래서 우리가 의도적으로 남자를 키웠어요. 지금 시점엔 힘이 남자 쪽으로 가고 춤의 양상도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쪽으로 바뀌었죠. 다시 여자 역할을 끌고 나가야 할 땐데, 그 명맥을 이끌고 있는 게 바로 진엽입니다.”(전)
“그래서 더 열심히 하게 되요. 여자 후배들도 각자 이름 알리고 같이 잘 돼야지 시너지가 생기겠죠. 교수님을 가장 닮고 싶은 게, 여성이 중심에 있다는 거에요. 여자 무용수들을 귀하게 쓰고 주제는 달라도 항상 여성에서 시작하시죠. 제 작품도 여성이 주체고, 남자는 거기에 필요한 캐릭터로 세웁니다. 피해 의식이 아니라 자기 이야길 하다 보니 그렇게 되죠. 남자보다 잘하려고 할 게 아니라 달라져야 해요. 콩쿠르에서도 여자들이 남자 테크닉을 많이 하지만 당연히 못 따라가거든요. 내걸 더 찾아야 되는 거죠.”(차)

요즘 방송 때문에 현대무용 관객이 많아졌는데요.
전: 관심 없다가 호기심을 갖게 되니 긍정적입니다. 방송에 비친 걸 현대무용이라 알고 오신 분들에게 우리가 다양한 춤의 세계를 보여줘야죠.
차: 연말에 같이 공연한 김설진씨 팬이 제 공연까지 보러 와 손 편지를 주고 가는데 참 고마웠어요. 그들을 위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은 해요. 팬 서비스 차원이 아니라 공유하기 위해서죠. 최근에 ‘페이크 다이아몬드’도 일부러 대중에게 맞춘 게 아닌데 관객이 즐겨 주셨거든요. 우리만 아는 걸 넘어 공유할 수 있는 중간지점을 찾고 싶어요.”

현대무용은 좀 어려워야 된다는 주장과 왜 어 려워야 되냐는 입장이 있잖아요.
차: 그런 의식을 갖고 작업하진 않아요. 제가 관심 가는 얘기에 대중도 관심 가져주길 바라죠. 얼마 전에 아버지랑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좀 더 대중적으로 하라고 하시더군요. 저는 프랜차이즈 음식점 주인은 되기 싫다고 했어요. 셰프가 돼서 멀리서 찾아오게 하겠다구요. 누구나 다 먹는 떡볶이, 냉면 이름 안에서 만드는 게 아니라 같은 재료라도 이름없는 새로운 걸 만드는 게 우리라고 생각하거든요.
전: 우리 남편도 그러길래 전 대꾸도 안 했어요.(웃음) 지적인 것만 추구하면서 작품에 서열을 매기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문제겠죠. 하지만 우리는 사명감이 있어요. 표피가 자극적인 것만 대중적이라 생각하는 마인드는 바꿔야 해요. 무엇으로 흥미롭게 만들 건가, 그게 곧 안무의 방법이거든요. 신나지 않아도 즐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게 우리 몫인 것 같아요.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전미숙 무용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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