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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서 말릴 때 중화학 집중 … 수출 대국 향한 강을 건너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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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호 10면

8년간 박정희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오원철 전 경제수석이 지난 20일 남산 순환로에서 서울시내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박 전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던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번화한 도심을 내려다보며 그는 “서울 만세다”라고 혼잣말을 했다. 김춘식 기자

72년 5월 30일 무역진흥확대회의 후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참모 한 사람을 서재로 불렀다. “임자, 100억 달러 수출을 하자면 무슨 공업을 육성해야 하지?” ‘임자’로 불린 이는 71년 11월부터 8년간 박 대통령 지근거리에서 경제정책을 보좌한 오원철(86) 경제수석이다. 오 수석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각하, 중화학공업을 발전시킬 때가 왔습니다.”

광복 70년, 기적의 70년 <3> 박정희 개발 모델과 70년대

 이듬해인 73년 1월 12일 박 대통령은 연두 기자회견에서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발표한다. 여기엔 철강·전자·석유화학·조선·기계·비철금속 6개 전략산업 육성 방안이 담겼다. 또 72년 10월 유신 때 제시한 ‘80년대 초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다시 한번 강조했다.

 70년대는 이처럼 정부가 목표설정부터 실천 방안까지 주도한 전형적인 개발독재 모델을 도입했다. 박 대통령이 기획하고 실행한 경제모델이란 점에서 ‘박정희 모델’이라 불리기도 한다.

1964년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이 베를린의 지멘스 공장을 돌아보고 있다. [중앙포토]

피라미드 쌓는 전략으로 전 산업 수출화
박정희 모델은 국가 활동을 경제발전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모델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발전국가 모델은 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국가가 자원을 통제하고 배분하기 때문에 국가 원수의 판단력과 추진력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다.

 최근 만난 오 수석은 중화학공업 육성 방안이 나오게 된 일화 한 토막을 들려줬다. 72년 청와대 지하실에서 ‘공업구조 개편론’에 대해 서너 시간 동안 브리핑을 했다고 한다. 중화학공업은 자본·기술 집약적 산업으로 부가가치와 생산성이 높으며 후진국이 따라오기 쉽지 않다는 점 등이 이 자리에서 보고됐다. 일본은 57년 중화학 공업 정책 선언 후 10년 만인 67년 100억 달러 수출 고지에 올랐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박 대통령은 아무 말 없이 다 들은 뒤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돈이 얼마나 들겠소?” 오 수석은 “100억 달러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고개를 돌려 남덕우 재무장관을 쳐다보고는 “남 재무, 댈 수 있어?”라고 물었다. 남 장관이 “액수가 커서요…”라고 말을 흐리자 박 대통령은 “내가 전쟁을 하자는 것도 아니잖소”라며 말을 잘랐다. 투자하겠다는 결정이었다. 100억 달러면 당시 한국의 1년치 GDP와 맞먹는 어마어마한 돈이다. 박 대통령은 산업 구조를 통째로 바꾸고, 엄청난 재원을 투입하는 결단을 이렇게 과감하게 내렸다.

 문제는 단지 자금 조달만이 아니었다. 중화학공업 육성 전략은 나라 밖의 거센 반대에 부딪혔다. 세계은행(IBRD)과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은 저임금 이점을 살려 노동집약적인 경공업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며 “자본이 많이 들고 고도 기술을 요하는 제철이나 자동차공업에 손 대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다.

 해외에서 자금 조달이 어렵게 되자 박 대통령은 내자(內資)에 눈을 돌렸다. 73년 12월 국민투자기금법을 제정, 국내 가용자금을 중화학공업 육성에 쓰도록 ‘국민투자기금’을 설립했다. 국민의 저축으로 정책금융을 조성해 중화학공업 육성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다는 취지였다.

 중화학 공업 육성의 최종 목표는 수출 증대였다. 박정희 정부는 수출입국(輸出立國)을 내걸고 수출기업들에 재정금융상 특혜를 줬다. 그 덕분에 대량생산과 대량수출이 결합한 수출주도 성장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75년 현대자동차의 컨베이어 시스템 도입이 대표적이다. 이를 기점으로 한국 경제에 대량생산 체제가 자리 잡았다. 76년 포니의 미국 수출은 수출주도 성장체제의 형성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대량생산체제 아래에서 장시간 저임 노동 구조는 수출기업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대량수출을 가능하게 했고, ‘대량생산-고생산성-저임금-대량수출’이라는 선순환을 이뤄 고도성장이 가능해졌다. 70년대의 연평균 성장률은 12.5%나 된다.

 산업구조의 고도화 전략은 70년대 경제발전 속도를 높인 주요 원인이다. 오 수석은 이를 ‘피라미드형 개발전략’으로 설명했다. 예컨대 의류산업 피라미드의 맨 아래에 단순 가공업인 봉제업이 있고, 그 바로 위에 중간원료인 옷감 만드는 산업, 그 위에 석유화학 산업이 놓인 것처럼 아래서부터 한 단계씩 산업을 국산화·고도화했다는 얘기다. 옷이라는 최종 제품이 국제 경쟁력을 갖추면 중간 원료를 국산화하고, 이어 원료 생산까지 국제 경쟁력을 갖춰 나가는 식으로 ‘전 산업의 수출화 전략’을 짜 나간 것이다.

 오 수석은 “천연 자원이 풍부하고 100년, 200년에 걸쳐 산업이 고도화한 나라들은 나무뿌리(원료)에서 줄기(중간원료)를 거쳐 열매(최종생산품)를 만들어 내는 입목형(立木形) 발전이 가능하지만 우리 같은 후발주자는 피라미드 쌓듯 거꾸로 접근해야 빠르게 선진국을 추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 산업의 수출화’라고 쓴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왼쪽)와 기능공 양성

“전우의 시체를 넘어 … 죽도록 일하겠습니다”
후진국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박 대통령은 기술적 기초 위에서 정책을 다루는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를 중용했다. 오 수석을 비롯해 김정렴 비서실장, 장기영·박충훈 부총리 등이 모두 이 범주에 속한다. 수석 비서관 중 정치인 출신은 없었다. 지역 안배 원칙도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청와대 수석 비서관이 7명이던 70년대 중반 4명이 월남한 피난민 출신이었던 적도 있다.

 오 수석은 “당시 공직자들은 나라를 일으켜야 한다는 막중한 사명감으로 일했다”고 회상했다. 그는 “어느 나라, 어떤 정권에서도 정책의 기본은 국태민안(國泰民安·나라가 태평해 백성이 편안함)”이라며 “국태란 국가 안보, 민안은 국민을 잘 살게 하는 것인데 과연 오늘날 공직자들도 이런 마음으로 일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고 말했다.

 공직자의 자세와 관련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줬다. 77년 5월 17일, 방위산업 국산화의 성과를 보고하는 자리. 각종 국산 무기 가운데 북한 공군의 습격에 대비해 만든 대공 벌컨포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이 자리에 오 수석을 보좌하던 이석표 비서가 벌컨포에서 나온 불발탄을 들여다보는 도중 갑자기 탄이 폭발해 목숨을 잃었다. 노발대발한 박 대통령은 “누가 사람 죽이며 무기개발을 하랬느냐”며 오 수석에게 “인명사고 책임을 지고 사표를 쓰라”고 지시했다. 아까운 인재를 잃은 박 대통령은 그 어느 때보다 강경했다. 오 수석은 박 대통령을 찾아가 돌연 군가를 불렀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그러고는 “나라를 위해 죽도록 일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도 화를 누그러뜨렸다.

 “죽도록 일하겠다”는 오 수석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77년 12월 22일, 그토록 바라던 100억 달러 수출을 마침내 달성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이날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제14회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오늘은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록되는 날”이라며 감격해 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였고, 산유국을 제외하면 세계 17~18위권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중화학공업 육성책에 힘입어 수출 품목의 공산품 비중이 90%를 넘어섰다. 그중에서도 철강·전자·선박·금속·기계류 등 중화학공업 제품 비중이 35%를 웃돌았다. 불과 10여 년 만에 우리 산업구조가 농·광산물에서 경공업 제품으로, 다시 중후장대형 중화학공업 제품으로 빠르게 변화한 것이다.

대기업 집중은 박정희 모델의 그늘
개발독재와 발전국가 모델을 차용한 박정희 모델은 이처럼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늘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한국 경제의 주요 문제로 거론되는 대기업에 의한 경제력 집중 문제가 대표적이다.

 당시 정부는 수출 주도 대기업에 재정금융상 특혜를 줬고, 대기업의 시장 지배력은 빠른 속도로 커졌다. 각 산업 내에서 상위 5개사 매출액 비중을 나타내는 시장 집중률(CR5)을 보면 68년 음료품·기계업·1차금속이 각각 72.6%, 45.0%, 68.4%였지만 73년 81.9%, 70.1%, 74.3%로 크게 높아진다. 정부와 대기업이 일종의 발전연합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정경유착도 생겨났다. ‘재벌에 좋은 것이 한국 경제에도 좋은 것’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며 생긴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오 수석은 선진국과 후진국에 적용하는 경제이론은 똑같을 수는 없다고 설명한다. 선진국 경제이론은 ‘이미 존재하는 경제에 대한 운영(Operation of Economy)’인 반면 후진국은 공업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업구조를 건설(Construction of Economy)하는 과정’이므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아파트를 예로 들었다. 선진국 경제이론이 준공된 아파트를 관리하는 것이라면, 후진국에선 자금을 마련해 땅을 사고 다진 뒤 자재를 구입해 아파트를 짓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는 “아파트 건설은 기술적 측면이 중시되는 마이크로(micro)한 문제인데 비해 아파트 관리는 매크로한 경영 문제”라며 “선진국 이론을 개발 초기 한국 상황에 적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한편 주한 미 대사관에서 일했던 그레고리 핸더슨은 『한국:소용돌이 정치(Korea:The Politics of Vortex)』(1968)에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서울 집중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수도권 중심 개발은 전국의 인구와 돈을 빨아들이며 비수도권을 황폐화했다.

 진보 진영에서는 바로 이런 박정희 모델이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에 끼친 과오를 부각하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얼마든지 민주적인 방법으로도 달성할 수 있었던 경제발전을 극단적 방법을 통해 달성했을 뿐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개발독재는 지금의 번영을 가져온 역사적 현실이었고, 당시 민주세력은 개발독재의 다른 대안을 만들지 못했다.

 이처럼 박정희 모델은 빛과 그림자가 있다. 진영논리로 무조건 찬양하거나 깎아내리는 대신 지금이라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박정희 모델을 뛰어넘는 새로운 발전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김형기 경북대 경제통상학부 교수, 박태희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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