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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7)-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50)|조용만|인촌과 보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1932년은 다사다난하던 해여서 그 전해 9월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군부는 3월1일을 기해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고 청나라 황제였던 보의를 집정으로 앉혔다. 이에 대해 「리튼」경을 단장으로 하는 국제연맹 조사단이 4월 만주에 달려와 실정을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4월29일에는 일황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상해거주의 일본관민이 모인 홍구공원에서 김구의 밀명을 받은 한인애국단 단원 윤봉길의사가 축하식 단상으로 폭탄을 던져 백천대장 등 10여명을 살상시켰다. 일본의 패전후 미주리함상에서 일본정부를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한 당시 일본의 외상이었던 중광규도 이 폭탄에 맞아 다리 하나를 잃었다.
이 홍구공원 폭탄사건으로 독기에 차있는 일본경찰에 도산 안창호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어 5월15일에는 극우익의 청년장교들이 수상관저를 습격해 견양수상을 사살하였다. 이 해에는 정치적·군사적인 큰사건이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이런 사건들은 본난에서 취급하지 않게 되었으므로 문화계의 관심사인 보성전문의 인계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보성전문은 구한말에 내장원경 이용익이 세워 우리의 손으로 경영해온 유일의 사학이었다. 연희전문은 미국에 있는 기독교계통의 재단에서 경영하는 것이므로 재정적 기초가 확고했지만 보성전문은 그렇지못해 이용익이 죽은 뒤 천도교에서 경영하여 왔는데, 그동안 여러가지 곤란한 사정이 생겨 1930년경에 와서는 재정이 몹시 궁핍하게 되었다. 당시의 보전교장이던 박승빈이 이 재정적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결과 인촌 김성수가 학교를 인계해 경영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 그와 교섭해 합의를 본 결과 1932년 3윌 김성수에게 학교경영의 일체를 넘기게 되었다.
한편 인촌측으로 말하면 동아일보의 경영이 틀에 잡혀 순조롭게 되자 인촌은 다시 대학을 세울 것을 결심하고 미국과 유럽을 순회해 세계 각국의 큰 대학을 두루 돌아본 다음 그 대학들의 건물과 경영상태를 면밀하게 조사하고 돌아왔다. 이렇게해서 대학 경영의 만반의 준비를 갖춘 다음 보전의 인수를 결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새로 대학을 설립할 것도 생각해 보았지만 총독부가 쉽게 허락할것 같지 않으므로 기존의 전문학교를 인계해 이것을 발판으로 대학을 세울 작정이었던 것이다.
인촌이 동아일보를 만들 때와 같이 이번 보전을 인수할 때도 그돈이 어디서 나왔는고 하니, 인촌의 양부 김기중과 생부 김경중 두분에게서 나온 것이다. 즉 김기중이 5백석 추수의 땅과 김경중이 5천석 추수의 땅을 내놓아 합계 5천5백석지기의 땅을 아들 인촌에게 주었으므로 그것을 가지고 보전을 인수하게 된 것이다. 이 땅값이 그때 시세로 환산하여 50만원이 넘는다고 하였다.
인촌 김성수가 백면서생으로 서울에 올라와 중앙학교를 인계, 경영하려 할때에도 그 돈을 준것이 역시 양부와 생부였다. 그때가 인촌이 25세의 젊은 청년이었던 1915년이었는데, 생·양부 두분이 경험도 없고 서울에 연줄도 없는 처지에 어떻게 큰 돈을 들여 학교를 인수하느냐고 반대하였다. 그러자 인촌이 단식투쟁을 해 마침내 생·양부는 그 뜻을 가상하게 생각하여 돈을 내놓았다. 지금 생각하면 인촌의 생·양부는 훌륭한 선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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